크리스천라이프

그대를 보내며 (91년 여름 故 金敎授의 靈前에 바쳐)

어제는 그대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며/ 삶과 예술(藝術)의 그윽한 뜻을 논하였는데 오늘 그대는 차디찬 껍질로 누웠고/ 떨리는 손길 불 그어 향(香) 겨우 사르고 나 또한 그대 앞에 껍질로 앉았네
(중략)

일어서 등 돌려 나 이제 나가네 누워있는 껍질의 그대도 떨치고/ 앉아있는 껍질의 나도 떨치고 죽음을 슬퍼하는 모든 이에게/ 우리의 껍질일랑 모두 맡기고 어딘가 살아있을 진정한 그대를 만나러/ 나 이제 나가네 (졸시 ‘그대를 보내며’의 처음과 끝)

김교수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친구입니다. 비 오는 날 제자의 문병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3살이었습니다. ‘그대를 보내며’는 그를 산에 묻던 날, 여름 장맛비가 무척도 끈질기게 내리던 날, 천안의 장지에 그를 묻고 빗속을 뚫고 차를 몰고 돌아오며 그를 추모하는 마음에 이끌려 지었던 졸시(拙詩)입니다.

슬픔이 음악으로 승화한 두 개의 추모곡
오늘 화요음악회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3중주 2번을 들으려고 음반을 고르다 문득 젊은 날 너무도 애석하게 가버린 친구 김교수 생각이 났습니다. 이 곡 일명 ‘슬픔의 3중주’가 추모곡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악적 재능이 없는 저는 친구의 죽음이 안타까워 겨우 볼품없는 시(詩)밖에 못 지었지만 음악사를 빛낸 천재들은 대선배 혹은 스승의 죽음을 기리는 흑진주같이 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대표적인 곡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3중주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며’와 라흐마니노프의 ‘슬픔의 3중주 2번’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대선배이자 스승과 다름없는 차이콥스키가 1893년 11월 6일 여러 가지 의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음엔 그가 냉수를 마셨다가 콜레라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고 했지만 그 뒤 조사 결과에 나온 사인(死因)은 약물 중독 또는 자살이라는 반갑지 않은 내용이 많았습니다. 사인이 무엇이었든 라흐마니노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년 시절 처음 스승 즈베레프(Nicolay Zverev) 댁에서 차이콥스키를 만난 후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고 차이콥스키도 라흐마니노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항시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차이콥스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라흐마니노프에게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차이콥스키가 생전에 그렇게 존경하였던 스승이자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루빈스타인(Nicolay Rubinstein)이 죽었을 때 피아노 3중주곡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며’를 작곡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슬픔 속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를 본받아 그를 추모하는 곡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저할 것 없이 그는 차이콥스키의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며’와 같은 형태인 피아노 3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6주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1893년 12월27일에 작곡은 끝났고 이렇게 태어난 곡이 ‘슬픔의 3중주 2번’입니다.

이렇게 해서 음악사에 가장 아름다운 사연을 지닌 그리고 피아노 3중주에 없어서는 안 될 보석 같은 두 개의 작품이 스승과 제자 혹은 선배와 후배라는 3대에 걸친 귀한 인연 속에 태어난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슬픔의 3중주 2번(The Elegiac Piano Trio No. 2 in D minor)
스승과 같은 차이콥스키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추모곡을 쓰기 위해 라흐마니노프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작곡 중에 그는 연인이었던 나타샤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하는 당신에게 편지 쓸 틈도 없이 이 곡에 열중하고 있소’라고 하며 ‘정말 진실하게, 그리고 모든 정신을 집중시키고 고통스럽게……나의 모든 감정과 힘을 다 바쳐서 작곡하고 있소,’라고 썼다고 합니다. 이 곡을 향한 그의 진심과 열정을 알려주는 일화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아름답고도 뜻이 깊은 비가(悲歌, Elegy)가 태어났습니다. 이 곡이 추모곡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들은 분들도 이 곡이 품고 있는 처절한 슬픔에 감동하여 아마도 누군가를 추모하며 쓴 곡 같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곡의 구석구석에서는 차이콥스키를 향한 라흐마니노프의 존경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나옵니다.

차이콥스키(1840~1893)와 라흐마니노프(1873~1943)는 한 세대의 나이 차이가 나지만 두 사람의 음악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광활한 대륙의 러시아 출신답게 그 호흡이 서유럽의 음악에 비해 유장하고 깁니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러시아 평원을 달려가는 기차처럼 느리지만 거대한 규모의 우울과 향수(鄕愁)를 담은 서정적 선율도 두 사람의 공통분모입니다.

그렇기에 라흐마니노프의 ‘슬픔의 3중주’가 차이콥스키의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며’를 그 내용에서 닮은 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저음역에서 커다란 파도처럼 일렁이는 슬픔이나 고음역으로 옮겨가며 폐부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 같은 선율이 서로 닮았습니다.

슬픔을 슬픔으로 치유해주는 곡
살다 보면 누구나 감당하기 힘든 슬픈 일을 겪습니다. 그 슬픔을 대치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럴 때 슬픈 음악을 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슬픔을 극복할 수 없다면 잊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슬픔은 슬픔으로 기쁨은 기쁨으로’ 대하면서 오히려 조금씩 가까이 삶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고희(古稀)를 넘게 살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제 주변 가깝던 사람의 이름을 지워버릴 수밖에 없을 때 밀려오는 허전함과 슬픔을 이제는 저도 슬픔으로 대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위대한 작곡가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우리와 다름없던 차이콥스키도 라흐마니노프도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픈 곡을 썼을 것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날 때 그리고 요즈음 하나씩 제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사라져가는 다정했던 사람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현실로 다가올 때 저는 그 슬픔을 슬픔으로 대하려 라흐마니노프의 ‘슬픔의 3중주 2번’을 듣습니다. 여러분도 같이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모두 3악장이며 연주 시간이 50분 걸리는 대곡입니다
마치 장송의 종소리와 같은 장중하면서도 음울한 분위기의 피아노가 단조의 선율을 반복하다가 이어지는 첼로와 바이올린이 애절하게 웅얼거리며 펼쳐지는 1악장을 듣노라면 벌써 우리의 가슴은 비탄에 젖습니다.

6개의 변주로 엮어진 2악장에서 주제의 선율은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작품인 환상곡 ‘바위’에서 따왔습니다. 주제를 ‘바위’에서 가져온 까닭은 차이콥스키가 이 곡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6개의 변주곡을 듣다 보면 마치 차이콥스키의 일생이 펼쳐지는 느낌입니다. 마지막 6번째 변주에서는 세 악기가 함께 깊은 슬픔을 명상적이면서도 절제 있게 노래합니다.

피아노의 강인한 연주로 시작되는 마지막 3악장은 짧지만 아주 역동적입니다. 라흐마니노프만이 낼 수 있는 강하면서도 깊은 피아노가 호방하게 울리며 슬픔을 표현하다가 바이올린과 첼로와 어울려 극적으로 폭발합니다. 나중에는 슬픔의 선율을 반복하면서 조용하고 평안하게 귓가에 남은 이명(耳鳴)처럼 여운을 남기며 끝이 납니다.

들을만한 연주
파벨 세레브리야코프(피아노), 미하일 바이반(바이올린), 로스트로포비치(첼로)의 연주도 좋고 보자르 트리오(Beaux Arts Trio)의 연주도 좋습니다. 하지만 화요음악회에서는 추모의 정을 듬뿍 담고 있는 이 곡의 대표적인 명연인 보로딘 트리오(Borodin Trio)의 1983년 녹음 연주로 들었습니다.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마태복음 8장 21절과 22절이었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우린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슬퍼만 한다면 결국 죽고 죽고 또 죽고의 악순환만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그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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