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독일 통일 배경 및 과정
제 2차 세계대전 독일의 패전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독일의 분단과 통일에 관련된 문제는, 독일의 내부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냉전 당시 최대 강국인 미국과 소련이 직면한, 또한 독일과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독일의 분단은 독일인의 의지가 아닌 서방측 연합군과 소련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양쪽 세력이 각각의 관할 구역에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면서 고착화되었다.

서독과 동독은 완벽한 주권 국가라기 보다는 제한된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태였고, 동독과 서독은 각기 동서 블록으로 편입되었다. 서독은 나토와 유럽 공동체로,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으로 편입되었다. 동-서독의 분단으로 연합국이 평화협정을 서명해야 할 대상인 통일된 독일의 주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평화협정은 미루어졌다.‘독일문제’로 표현되는 독일 분단의 문제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었다.

독일 이웃국가들의 대다수 주민에게 있어서 독일 문제는 ‘German Problems‘ 를 의미하였으며, 그 주요 인식은 어떻게 하면 독일의 분단을 지속하게 하여 다시는 독일이 유럽의 평화를 파괴할 수 없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분단 이후 독일 국민 대다수에게 있어서 독일문제란 ‘German Question’을 의미하였고, 그것에 관한 다양한 견해 속에서도 공통분모는 독일 민족을 어떻게 하나로 합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독일 통일을 이루기 위한 동 서독 자체 문제 및 국제정치 상황에서의 통일 여건의 불리한 상황가운데서도, 1945년 분단되었던 독일은 정확히 45년만인 1990년에 통일을 이루게 되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독일이 통일하게 된 과정과 원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자 한다.

사회, 문화, 정치적인 면
첫째, 서독의 동방정책 강화 1969년~1974년
서독은 자국이 일방적으로 수혜를 받게 되는 통일방식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 분단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동유럽 국가 및 동독과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이로 인해, 독일 대내적으로 양 독의 분단을 고착화할 것으로 여겨졌던 동서독 상호인정과 동서독의 국가간 교류는 양 독의 무역과 문화관계가 강화하면서 서독인과 동독인 사이에 하나의 독일이라는 의식을 강화시켰다.

둘째, 서독의 주변 강국에 대한 독일 통일 설득 노력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의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왔을 때, 서독 정부는 주변 강국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독일 정부의 노력의 결과 1989년 12월8일,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열린 유럽 이사회 (European Council: 유럽공동체 정상회담)는 독일 통일을 인정하였다.
이 정상회담은 독일 통일이 유럽 통합을 존중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이를 승인할 것이라고 하였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가장 강력하게 서독 정부를 지원한 것은 미국이었다.

셋째, 1970년대 동서독의 방송 통일
동서독의 방송 통일은 독일 통일을 이끈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 동독 공산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이끈 것은 동독 시민이 서독의 방송을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었던 것에 있었다.

1954년부터 동독 언론인들은 서독에 특파원으로 상주할 수 있었다. 서독 언론의 동독 특파원 파견은 1972년 서독정부가 ‘언론인의 활동 자유 및 보도행위’ 조약을 동독 정부와 체결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또한 베른 하르트 포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선,베를린이라는 정치적 ‘통풍구’가 존재하였고,동 서독 간에는 상호 우편교환 방송청취,텔레비전 시청이 가능했습니다. 즉,통일 직전의 동독인들의 서독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단 말씀입니다”

넷째, 1980년대 서독의 동독에 대한 강경책
동독과의 관계에서도 통일에 직면한 시점에서 서독 정부는 강경책을 구사하였다. 1989년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징후를 통해 암시되었다. 그럼에도 베를린(Berlin)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의 권력이 교체된 후에도 서독 정부는 동독이 요구하는 경제 지원을 거부한 것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1년도 안된 1990년 11월 3일 독일 통일이 급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동서독 내적인 배경에는 서독정부의 ‘대동독 강경책’이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콜 정부는 동독 시민에게 점진적인 동독 체제 개혁이 아니라 서독식 사회 모델, 더 나아가 흡수 통합이 아니고서는 서독과 같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동독시민은 더 이상 동독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독과의 통일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독정부는 서독과의 통일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째, 고르바초프의 개혁 (페레스트로이카, Perestroika)과 개방(그라스노스트, Glasnost) 정책으로 인한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국가 붕괴
독일 통일을 둘러싼 외부 여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은 동-서간 긴장 완화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주의 경제의 몰락으로 등장한 고르바초프의 소련의 개혁을 위해 도입한 ‘개혁’과 ‘개방’ 정책은 소련의 영향 아래에 있던 동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붕괴되었다.

여섯째, 동독 시민운동의 통일 주도
기대치 않았던 독일 통일의 핵심적 동력은 사실상 동독의 시민운동, 특히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의 시민운동 내부의 변화에서 나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전후하여 동독 시민운동의 주장은 체제개혁에서 독일 통일로 급반전을 이루었으며 실질적인 흡수통일의 수용이 대세가 되었다. 동독 내부에서는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1989년 5월 7일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부정선거 규탄 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된 동독 개혁운동의 중심지는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의 진원지인 니콜라이 교회이며, 동독 11개 지역 대표 30명이 결성한 재야단체 ‘신광장(Neues Forum)’이 규탄운동을 주도하였다.

염돈재 교수는 “독일 통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결과가 이룬 성과가 아니다. 독일 통일은 정상회담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동서독이 화해하고 협력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느 국내학자의 주장처럼 동독 공산정권 지도자들의 ‘결단’으로 통일이 된 것도 아니다. 독일 통일은 동독 공산정권이 주민의 시위로 무너지고, 동독 국민들이 서독연방에의 가입을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일곱째, 서독의 성숙한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영향
독일통일은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에 기반한 통일이다. 독일은 19세기 말에 민주주의 헌법을 가진 국가로 수립되어 20세기 초의 나치 히틀러라는 위기를 경험하고 전후에 매우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재탄생했다.

독일은 강력한 아래로부터의 정당 체제, 그에 기반한 비례대표 선거제도, 의회제도, 단순한 자치가 아니라 분권형 연방제라는 뿌리 깊은 민주주의의 저력이 있었다. 김학재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동서독이 통일될 때 동독은 서독의 연방주로 쉽게 편입되었고, 다행히 1945년 전까지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동독에선 1990년에 다시 선거가 치러지고 다당제가 복원되었으며, 서독 수준의 복지가 동등하게 보장되었다. 통일 당시 동독 인구 1,600만명(서독은 6,200만)이 큰 혼란 없이 같은 공동체에서 살게 되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