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 역사적 배경
소련 공산정부 하에서의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배경과 역사는 공산혁명 이전과 공산혁명 이후로 구분되어 설명될 수 있다.
공산혁명 이전에 슬라브 민족 계열인 러시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 러시아 민족은 동부 유럽 전 지역에 흑해로부터 백해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살면서 자연을 숭배하는 이교도 민족이었다.
이러한 고대 슬라브 민족이 끼예프(Kiev, 우크라이나의 수도)에 근거지를 둔 루릭가에 의해 연합된다. 이 루릭의 후손 중에 끼예프의 대공인 블라디미르(Vldimir)에 의해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 가 국교로 받아들여졌고, 988년 끼예프의 시민들이 세례를 받게 된다.
동방 정교회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러시아 교회가 콘스탄티노플(Constntinople)의 관할 아래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스럽게 비잔틴의 신학뿐 만 아니라 예술, 정치제도, 풍습이 러시아 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는 국가 특히 황제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후, 1453년 터키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넘어가게 되자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정교회의 진정한 후계자로써 정통성을 확립했다고 확신했다.
신학적으로는 모스크바는 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이은 기독교의 중심, 즉 제3의 로마이며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1547년 러시아 짜르(Tzar) 황제는 동로마 제국의 후예가 되었으며, 국가와 교회 모두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1721년 뽀뜨르(Peter) 대제는 러시아의 교회 조직을 변경시키고 황제를 최고 지배자로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교회를 국가 기관의 일부로 만들어 자신의 개혁을 추진하는 기관이 되도록 하였다. 이 시기부터 볼세비키 혁명 때까지 국가는 완전히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 기관의 한 행정부서로 종속시켰다.
공산혁명 시기인, 러시아제국 말기에 황제와 제국은 교회를 제국을 지지해 주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혁명의 열기와 민중의 분노를 무마하기 위해 기득권층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힘을 빌었다. 이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황제의 꼭두각시로 일반 민중들로부터 원성이 매우 높아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해외지역 선교관심
그러나 이 당시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일부는 해외지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선교에 동참하였다.
교회 내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일부 순수한 정열의 선교사들은 시베리아로, 만주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때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거둔 열매는 상당한 것이었으며 헌신적으로 동토의 시베리아 오지에서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러시아 정교회 박해 시작
1917년 볼셰비키 1차 혁명이 성공을 거두고 잠시 동안 러시아에 자유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총대 주교 티콘은 그 당시 정국에 대한 그의 목회서신을 보내게 된다. 그는 레닌과 볼셰비키를 강한 어조로 비난했고, 그들을 인간의 형상을 한 짐승이며 그들을 교회에서 출교함을 알렸다. 결국 러시아 정교회와 볼셰비키의 갈등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법령을 발표함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정교회는 더 이상 국가의 사법제도에 간여할 수 없었고 학교 교육을 주관하지 못하였고, 국민의 출생, 결혼, 장례의 등록 업무도 빼앗겼다. 은행 잔고, 토지, 건물, 모두가 국가에 귀속되었고, 신학교도 물론 폐쇄되었다. 많은 교회가 문을 닫았고, 수많은 사제들이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령을 당하였다.
소련 공산당 정부는 어용 기독교단체를 포섭 조직하여 정통 정교회를 분산 무력화시키고, 정교회를 말살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셰비키의 지지를 얻은 러시아 정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생긴 ‘산교회’는 1923년 모스크바 총회를 열어 결의하기를, 자본주의는 죽어 마땅한 죄이며,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했다.
또 볼셰비키 소련 정부를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에 맞으며 모든 인류를 진보시키는 이상적인 성스런 정부라고 하였다.
1926년 소련 공산정부에 의해 정교회 사제들에 대한 체포는 다시 시작되었다. 교회의 사역은 이제 내세의 세계에만 제한되었고, 무신론 정권에 종속 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교회, 즉 러시아 정교회의 하부 조직도 심각한 도전에 부딪혔다. 공업화와 집단 농장화는 전통적인 농경사회인 소련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교회도 변화된 공산주의 사회와 문화에 적응해야 했다. 교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사제들에 대한 세금은 매우 무거웠고, 주거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성가대원들은 연맹 회비를 강제로 내야 했다.
박해 속에서 강하여져 가는 교회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시련 속에서 더욱 강하여져 갔다. 교회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제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교인들의 도움으로 해결되었고, 사제들은 비밀리에 마을 주민의 장례, 결혼, 세례에 참여했고, 사회적, 가정적, 경제적 상담 역할을 계속했다. 집단 농장에서는 수확과 경작을 해야 하는 시기에도 종교적 성일을 지키는 곳이 있었다.
민중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간 신앙을 무신론자들이 없앨 수는 없었다.
모스크바는 여전히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였으나, 수백 개가 넘던 교회는 대부분 박물관이 되었고, 1958년에는 단지 소수의 교회 만이 문을 열었다.
시골과 역사적인 도시에서는 교회의 활동이 어느 정도 활발하였으나, 현대화되고 산업화된 도시에서는 교회 활동이 미비하였다. 새로운 사회주의 도시에서는 정부가 교회의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 사회주의 체제의 잘못된 모순점이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구호만으로 주님들의 영적 갈급을 채워주지는 못하였다. 결국 주민들의 요구로 교회 설립을 허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 부흥을 외부로 선전할 수가 없었다.
영적 갈급이 클수록, 영적인 요구가 클수록 탄압도 커져 갔기 때문이다. 넓은 땅 덩어리 어디에서나 목자들을 간절히 기다리는 정교회 신자들이 있었다.
광활한 동토의 땅, 시베리아(Siberia) 지역 선교
광활한 동토의 땅 시베리아는 소련 공산당 정부의 이상이 담긴 곳이었다. 이곳에 그들은 교회가 없고 신이 없는 지상천국 또는 사회주의 국가의 이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교회를 완전히 철거하였으나 결국 교회를 세우도록 다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도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우랄(Ural), 몽골(Mongolia) 지역에서도 사제들이 활발히 순회하며 설교하며 전도하였다.
그러나 시베리아 북쪽 끝 북극권에 가까운 원주민들에게는 소련정부의 정교회에 대한 통제 정책으로 인해 기독교와 이교도를 혼합한 형태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세례, 성화, 기독교의 명칭은 그들의 무속 신앙에 결합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 니콜라스(St. Nicolas)를 전설 속의 선한 영으로 또한 짐승들을 보존하는 영으로 둔갑시켰다.
그동안 정교회의 선교 활동은 원주민들의 이교 풍습을 버리는데 상당히 공헌 했으나 공산정권의 방해로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