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켜켜이 쌓이고 있다. 퇴적이 진행된 지 오래다. 은퇴자는 투명 인간이 되었다. 베이비 붐 세대가 저물어 간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신생아 출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의 경우도 한국전이 휴전에 들어가자 1955년부터 1963년까지 9년 동안 태어난 사람이 8백여만 명에 이르렀다. 1958년은 백여만 명의 출산을 기록하다가 1958년 전후로는 80여만 명씩 태어났다.
또래들이 많아지자 생존에서 경쟁으로 바뀌었다. 학교는 과밀 학생으로 2부제 수업을 했고 버스타기는 치열했다. 대학생이 되자 음악다방과 가요제, 그리고 과 단합과 등산을 가기 위해 교외선 열차는 만원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대학 가기는 과열 경쟁으로 성적순이 되었다. 대학을 나와도 직장 잡기는 더 어려웠다. 사글세나 전세로 신혼집을 얻어 살다가 은행 대출과 빚을 더해 집을 늘려갔다.
첫아이의 출산으로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변두리에서 시작한 살림은 조금씩 형편이 나아져 작은 아파트이지만 첫 내 집을 마련했다. 집들이 때는 얼마나 기쁘고 좋았는지 모른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중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강남살이를 하느라고 버거운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자녀가 서울 안의 대학에 합격했을 때의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녀 교육으로 그동안 알뜰살뜰 모으고 대출받은 돈이 빠져나갔다. 그래도 부동산 가격이 올라 자산을 늘려온 셈이다. 한참 자녀 결혼으로 목돈이 필요한데 직장에서는 은퇴해야만 했다. 은퇴는 사회로부터의 퇴장보다 더한 퇴출처럼 여겨졌다.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지 못하고 갑자기 맞이한 위기와 같았다.
하루 사이에 직장 생활에서 은퇴자가 되니 당황스럽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조차 서지를 않았다. 하루하루가 일상으로 지나갔다. 은퇴는 지뢰밭 같은 사회생활에서 터진 폭탄과 같았다.
부모까지 부양한 세대였는데 자녀 세대는 개인 세대여서 함께 살기도 어색했다. 다시 변두리의 작은 집 한 채에서 가진 현금도 거의 없이 은퇴자로 점점 썰물이 되어갔다. 중산층의 자립의 상징이었던 서울의 아파트 한 채가 다시 자녀 결혼 지원으로 지금 남은 집은 지나온 삶의 기억이 머문 공간이 되었다.
결혼한 자녀는 민영 주택 추첨으로 살다가 은행 대출로 집은 샀지만, 풍요 속에 현금 부족으로 빈곤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안쓰러워도 더 도와주지 못하고 사는 자신을 미워하면서 눈물은 내려가도 숟가락은 올라가는 하루를 사는 작은 집 한 채로 남은 인생이 됐다. 돌아가신 부모가 그랬듯이.
재산보다 믿음을 유산으로 주는 자녀를 길러야 더 공존의 관계로 남는다. 그러면 몸은 죽었을지언정 부모의 등을 기억하고 추억해 주는 자녀가 있는 한 그 부모의 마음은 죽지 않고 사는 인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