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절은 ‘끝으로’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끝으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트로이폰’인데 담긴 의미는 마지막으로의 의미가 아닙니다. ‘트로이폰’은 두 가지 용례로 사용됩니다. 첫 번째는 새로운 주제로 넘어갈 때 사용하거나, 또는 서론의 이야기를 하다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니까 집중해서 들으세요” 이럴 때 사용하는 단어가 “트로이폰”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구원을 누리는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의 비결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누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9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기쁨의 서신’입니다.
“너희가 구원받은 자들이냐,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자 하느냐?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들이냐? 그렇다면 구원받은 백성들은 기뻐하라”는 것이 빌립보서 전체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거장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삼촌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어떻게 크리스천을 공략할 수 있을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합니다. 그 공략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쁨을 빼앗으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빼앗긴 크리스천들은 무력해져서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잘 동행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희락(Joy) 아닙니까? 성령이 오시면 우리 마음의 기쁨이 회복됩니다. 성령 받고 예수님 만났는데 우울한 사람 보셨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우리 가운데 회복이 일어나고,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살다 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기뻐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는 로마에 가택 연금처럼 감옥에 갇힌 상황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돈도 없어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선교헌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돈도, 자유도 없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최악 아닙니까? 그럼에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9번이나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왜 기뻐할 수 있었고, 이 기쁨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차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기쁨입니다. 몸이 아프던 사람이 나아서 기쁘거나, 배가 고팠던 사람이 음식을 먹고 포만감에 희열을 느끼는 것, 이것을 육체적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쁨은 하루에 수십 번도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도덕적 기쁨(심미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었더니 마음에 기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실천을 통해서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기쁨은 이런 두 가지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런 기쁨은 세상 사람들도 다 누리는 기쁨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차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이 기뻐하라 명령하는 것은 바로 영적인 차원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기쁨은 언제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은혜, 기도나 말씀 응답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의 크심, 이런 것들을 통해 알게 되는 영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가진 자가 아닙니다. 강한 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잃은 자이고 약한 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라”라고 할 수 있는 권위와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만일 모든 것을 누리고 모든 것이 온전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자를 찾아가서 “기뻐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라고 한다면, “너나 혼자 기뻐해라”라고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기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졌다고 감사하고, 기뻐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향해 “감사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할 때 파워가 생깁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어디서 출발할까요? 3장 1절에 그 비결이 나옵니다. “주 안에서(엔크리스토)”입니다.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뻐하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기 어렵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는 형편에서 기뻐하라는 메시지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수 있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 안에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구원의 첫 감격을 누렸을 때 어떠셨습니까? 굉장히 감사하고, 기쁨이 넘치지 않던가요? 주님 안에서 발견 됐던 내 모습들, 연약한 내 모습을 주님이 감싸 안아 주시고, 위로해 주실 때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기쁨이 있지 않던가요? 바울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 후반부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는 안전하니라”
바울이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는 말을 처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번 권면하는 것이 바울에게도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좋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같은 말을 여러 번 말한 이유는 어떤 것에 길들여지는 데 있어서 반복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육도 똑같습니다. 반복적으로 해야 실력이 됩니다.
우리의 본성은 가만히 두면 죄의 뿌리가 있어서 자꾸만 어둡고 불안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건과 환경과 상관없이 기뻐하는 것을 훈련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상시 영성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니엘입니다. 제가 다니엘서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6장 10절 말씀인데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다니엘 6:10)”
지금 다니엘 6장의 상황은 다니엘을 시기하는 신하들이 올무를 놓고 걸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신에게 절하면 사자 굴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변함없었습니다. 다니엘의 믿음과 영성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내용은 감사였습니다. 다니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믿었기에생명의 위협과 권모술수가 넘치는 정치판에서도 감사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직면한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힘겹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다시 눈을 들어 주를 바라봅시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주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함께 다시 기뻐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