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하일리겐슈타트와 전원 교향곡

화요음악회에서는 베토벤의 6번 교향곡 ‘전원’을 듣기로 한 날입니다. 음악을 듣기 전에 잠깐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의 집 이야기를 했습니다. 약 2년 전에 아내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빈에 갔을 때 일부러 하루 시간을 내서 찾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입니다.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의 유서
그곳을 찾은 이유는 베토벤이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유서를 썼을 때 31살의 한창때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죽음을 생각했을까요? 20대 후반부터 귀에 이상이 있는 것을 알고 은밀히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과가 없자 의사의 조언대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하일리겐슈타트에 집을 얻어 쉬었습니다.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귓병이 백방으로 치료를 해도 더욱 악화하자 그의 심신은 극히 쇠약해졌습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비장의 유서를 작성하여 동생에게 보내면서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 개봉하지 말라고 썼습니다. 다행히 그는 죽지 않았고 이 유서는 그 후 25년이 지난 1827년 그가 56세 일기로 숨을 거둔 다음 날인 3월 27일에야 발견됐습니다.

베토벤 하우스(Beethoven-Haus)에 도착하다
빈 중심에서 북으로 약 6km 떨어진 하일리겐슈타트는 숲이 많고 냇물이 흐르고 포도밭도 사방에 있어서 아직도 전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악성 베토벤의 삶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고 더욱이 그가 유서를 썼던 베토벤 하우스가 있어 명소가 되었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 말은 독일어 그대로 해석하면 성인(聖人)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 좋은 이름 덕분에 베토벤 같은 악성이 찾아가 머물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베토벤 하우스(Beethoven-Haus)는 프로부스가쎄(Probusgasse) 6번지에 있습니다. 집 입구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1802년 10월 6일 이 집에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썼다,’라고 적힌 검은 대리석 판이 악성(樂聖)의 힘들었던 운명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 벽에 산책하는 베토벤의 모습이 벽화로 걸려 있습니다. 책에서 많이 본 익숙한 모습이지만 베토벤 하우스에서 보니 새로운 감회가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산책하는 그가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웅장한 교향곡과 아름다운 협주곡의 선율이 흘러나올 것 같았습니다.

베토벤 기념관
더 안으로 들어가자 기념관이 있었고 거기 전시된 자료 중에서 먼저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평온히 잠든 그의 얼굴이지만 험난했던 인생 역정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바로 옆에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가 있었습니다. 그의 육필 유서 앞에 서자 엄숙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유서를 쓰고 그냥 죽었더라면 그는 보통의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경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유서 말미에 “죽음이여, 언제든 오라. 나는 당당히 네 앞으로가 너를 맞으리라,”고 썼듯이 그는 당당하게 죽음과 맞섰고 이겨냈습니다. 그 뒤 살아있는 25년 동안 음악사상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에 악성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베토벤의 보청기
유서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피아노가 있었고 그 위에 뿔피리같이 생긴 이상한 금속 물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게 뭐지 하는 다음 순간 나는 보청기로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말년에 청력을 거의 상실한 베토벤이 오직 이것에 의지하여 작곡했다던 그 보청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작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나팔만큼 크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나팔만큼 큰 보청기가 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에는 베토벤도 있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커다란 보청기를 귀에 갖다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필사적으로 음을 들으려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당신께서는 그렇게 어렵게 25년 동안 작곡을 하셨군요. 우리가 평안하게 들으며 울고 웃는 당신의 곡들이 이렇게 태어났군요,’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그랬습니다. 베토벤은 유서를 쓴 뒤 오히려 절망의 순간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남들이 다 듣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신(神)이 그에게만 허락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그는 주옥같은 걸작들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이상하게 생긴 보청기를 통해서 그는 신의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불현듯 일어나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숲길을 산책하면서 오히려 신에게 감사하며 작곡을 했을 것입니다.

교향곡 6번, 전원(田園)
그 힘들던 시기에 그가 작곡한 곡이 교향곡 6번 전원입니다. 보통 4악장으로 되어 있는 다른 교향곡과 달리 이 교향곡은 5악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악장마다 제목이 붙어있는데 마지막 5악장의 제목이 ‘목동들의 노래 – 폭풍우 뒤의 기쁨과 감사’입니다. 유서를 쓰고 죽기 직전 오히려 신(神)의 은총을 깨닫고 일어서 신에게 감사하는 곡을 쓴 베토벤은 역시 큰 사람이었습니다. 악성(樂聖)의 칭호가 그에게 결코 지나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곡의 4악장엔 천둥이 치고 폭우가 내립니다. 마치 유서를 쓸 때의 베토벤의 심정과 같습니다. 그러나 4악장이 불과 3분 정도에 그치는 짧은 악장인 것처럼 베토벤은 그 역경을 빨리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평온함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5악장처럼 베토벤은 평온을 회복하고 일어나서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곡을 썼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원교향곡에 담긴 깊고 큰 뜻을 제대로 깨달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돌아서서 밖으로 나오는 내 머릿속에서는 5악장 도입부의 클라리넷과 호른 소리가 평화롭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자연을 사랑했던 베토벤
베토벤은 진심으로 자연을 사랑했고 그 아름다움과 위대함에 빠져서 자연을 찬양한 작곡가입니다. 그렇기에 로멩 롤랑은 베토벤 평전에서 베토벤이 ‘전능하신 신이시여! 숲속에 있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거기서는 모든 나무가 당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자연 속을 거닐며 창작의 영감을 찾았고 자연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청력이 점점 나빠지는 그에게 자연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도 되었고 슬픔과 좌절감을 달래주는 어머니도 되었습니다. 이런 자연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낳은 작품이 전원교향곡일 것입니다.

베토벤의 아홉 개의 교향곡 중 표제적인 성격이 강한 이 곡의 제목 ‘전원교향곡’은 베토벤이 직접 붙였다고 합니다. 이 곡의 제1 바이올린 악보 뒷장에 베토벤이 `전원의 교향곡, 시골의 생활과 추억’이라고 직접 써놓았으니 신빙성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 곡은 특히 전 악장에 표제가 붙어있어 훗날 베를리오즈와 리스트 같은 후배 음악가들이 표제 음악을 작곡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모두 5악장으로 된 각 악장의 표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시골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즐거운 기분
  2. 시냇가의 정경
  3. 시골 사람들의 유쾌한 모임
  4. 폭풍우
  5. 목동의 노래, 폭풍우 뒤의 기쁨과 감사
  6. 칼 뵘(Karl Bohm)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이 곡은 연주하기가 쉽지 않아 의외로 좋은 연주가 드뭅니다. 하지만 칼 뵘이 지휘봉을 잡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막히지 않는 템포로 이 곡의 부드러운 표정을 살려 자연스럽고 싱그럽게 베토벤이 소리로 그린 그림을 표현해냈습니다. 자연의 섭리가 살아있는 연주입니다.

헤어지기 전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구약의 스바냐서 3장 17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누구에게나 살다가 보면 힘들어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아마 베토벤도 그랬기에 유서를 쓰고 죽을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사랑하셔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마음을 돌이켜 더욱 열심히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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