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하나님의 선교는 또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중요시한다. 근대 선교 운동의 제창자인 반 엥겐은, 교회는 성경을 연구할 때 항상 선교하는 공동체로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교는 복음과 교회의 삶의 핵심에 놓여 있으며, 선교는 바로 교회의 근본적인 본질이다. 또한 교회는 복음을 의미심장하게 전달하고, 사람과 사회와 문화를 회심시키고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언적 대행자로서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가 속하여 생활하고 사역하는 사회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선교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
나는 오래전에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마오리 원주민들에 대해 선교를 시작할 당시에 많은 문화 충격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들은 이불 같은 천으로 옷을 대신해서 입고 있었고, 매트리스에 비스듬히 누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습관과 인사를 나눌 때에 자기의 코와 나의 코를 서로 마주치게 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또한 특이한 것은 상대방의 물건을 자기 것으로 공용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어 남의 집을 방문해서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거리낌 없이 그냥 가지고 가는 그들만의 문화가 있었다. 이외에도 얼굴과 몸에 타투를 새겨 처음에 보기에는 무서운 인상을 주었다. 나는 후에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마오리 원주민들은 남태평양에서 오랫동안 삶을 영위해온 섬나라 민족이라 성격이 낙천적이고 한편 주변 자연의 영향을 받아 영적인 면을 소유하고 있다.
인사를 나눌 때 코를 마주치는 이유는 서로가 영적으로 교감을 같이 한다는 형제로서의 친밀한 의미를 뜻한다. 또한 혈연의식이 매우 강하여 가족별로 모여 사는 부계 또는 모계 중심의 삶으로 자기의 소유가 없이 서로의 물건을 나누는 문화를 갖고 있으나, 타민족과는 교제를 꺼려하는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얼굴에 타투를 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로 오래 전부터 행해오던 남태평양의 공통의 문화이다.
뉴질랜드 선교역사 문제점
약 250년 전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선교사들이 뉴질랜드의 어디를 불문하고 마을과 도시마다 교단 별로 수많은 교회를 세운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웠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한국의 교회 수보다 뉴질랜드의 교회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뉴질랜드의 교회는 많은 교회 건물들이 문을 닫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에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신앙의 나태함으로 인해서 이기도 하지만 서구 선교사들이 마오리 원주민들 문화에 대해 선교의 상황화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은 이유에도 기인한다.
과거에 선교사들이 뉴질랜드에 세운 교회 건물은 서구 유럽에 세워진 교회 건물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교회 건물만 보더라도 선교보다는 문화적 제국주의와 우월주의 모습이 비추어진다.
선교에 있어 더욱 문제인 것은 1840년에 마오리들과 영국 국왕이 체결한 와이탕이 조약으로 인해 대부분의 마오리 땅이 영국인의 독점권이 되었으며, 당시 조약의 결정을 위해 성공회 선교사들이 중간에서 활동한 사실은 마오리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의 상황화 필요성을 크게 제시해준다.
선교사 자신들의 문화 짐 꾸러기
아시아권에서 선교 활동을 해온 짐 츄는 서구 선교사들이 자기 나라에서 친숙하게 사용했던 선교 방법들을 선교지에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언급하였다.
“찬송가 가락도 서구의 것이었고, 교회 건물도 자기 나라의 것과 거의 비슷했으며, 선교 도구나 자료들도 서구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따라서 선교지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하나의 서구 종교로 여겨졌다.”
대개 선교사들은 선교지로 갈 때 ‘자신들의 문화’라는 짐 꾸러기를 함께 가져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선교지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다.
어느 선교지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하는데 위의 언급된 내용들을 보면 그 영접이 미심쩍은 것인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남부 아시아의 어떤 나라에서는 선교사가 묻는 말에 ‘예’라는 대답이 그리스도를 그저 많은 신 중 하나로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예’라는 대답이 ‘당신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경청하고 있습니다.’ 또는 ‘당신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타 문화권 선교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선교지의 문화와 언어를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하나의 문화적 맥락 또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숙지해야 하며, 바로 여기에서 ‘상황화’ 문제의 중요성이 제기된다. 자칫 상황화에 대한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일생 동안 선교사가 힘들게 사역하였던 결과가 헛되이 될 수도 있다.
다른 문화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몇 마디 말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바울 자신도 인정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했다(데살로니가전서 1:5) 바울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며 살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타 문화권 사역자는 자신의 이전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새로운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려면 상황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상황화’란 무엇인가?
짐 츄는 이렇게 정의한다. “타 문화권 선교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화적 상황은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서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황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한 다음, 메시지의 내용을 그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정의하고 각색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 문화권 사역자가 수행해야 할 상황화라는 과제이다.”
데이빗 헷셀 그레이브는 “기독교 상황화는 하나님의 인격, 사역, 말씀 및 의지에 대한 메시지를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한 방식으로 소통하려는 시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수용자들의 문화적 실존적 상황들에 의미 있게 소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선교사는 자신이 사역하고자 하는 타 문화권 지역의 사람들은 선교사 자신의 인생관과 아주 다른 가치관과 신념,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 문화적 감각을 가진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성경적 진리에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는 현실적인 요구는 무엇인가? 동일한 사역 방법들과 유형들이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도 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