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장 1절-8절, 부활은 삶으로 맞아야
나이 80대에 아내를 잃은 사람이 있습니다. 살 만큼 산 나이였지만 아내가 떠난 후 민망할 정도로 자나 깨나 아내 생각뿐입니다. 혼자 남은 적막감에 몸을 떨면서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오늘 아침도 6시가 되었다. 행여 아내가 새벽기도 갔다가 돌아오지나 않나 대문 앞을 기웃거려 본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진종일 심방하고 지금쯤 돌아오지 않나 하고 내 마음은 동네 골목을 헤맨다. 바람결에 부엌문 닫히는 소리가 나면 아내가 아직 설거지를 하나 부엌을 기웃거린다. 아내의 줄 친 성경을 보면 안경 낀 흰머리를 한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 주여! 제가 죽는 날 꼭 하늘나라에 가서 아내를 만나볼 수 있겠지요.”
죽음이 주는 아픔과 그리움이 진하게 베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가슴 저미는 것은 그것이 갈라놓는 이별의 아픔 때문입니다.
굴려진 돌, 활짝 열린 부활의 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주님을 사랑했던 세 여인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도 슬픔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믿기도 싫었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슬픔의 무게에 눌려 눈물이 음식이 되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벅찬 사랑을 받았던 이들이었습니다. 버려진 인생에 찾아오신 주님, 하나도 아닌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있을 때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 주신 분이었기에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주님을 늘 가까이에서 모셨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했기에 그 아픔은 더욱 컸고, 그 슬픔은 그만큼 진하고 애달팠습니다. 가슴앓이 사랑은 쉽게 잠들지 못하게 했고 사흘째 새벽이 오기 무섭게 귀한 향유를 가슴에 품고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집을 나서게 했습니다. 그날, 첫 부활의 아침은 그렇게 깊고 깊은 슬픔의 늪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근심이 여인들에게 스며들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볼 수 있을까? 로마 군병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할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덤을 막은 큰 돌을 옮길 수 없다는 조바심으로 여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햇빛이 사라져버린 응달이 되어 있었습니다.
날은 여전히 그날인데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무엇인가에 눌려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무슨 고통의 돌이 나를 짓누르고 있어 내 마음이 차가운 겨울처럼 느껴지고 있습니까? 내 사업, 내 가정, 내 건강, 내 앞날을 막은 돌을 치울 수 없어, 굴려 버릴 힘이 없어 울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무덤을 향해 달음질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을 들어 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4절). 이미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옮기셨습니다. 나는 애만 태웠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돌을 굴려버렸습니다.
주님은 내 고통을, 가슴 저미는 내 사연을 아십니다. 내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아십니다. 그래서 내 삶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워주십니다. 불가항력적인, 세상이 답을 줄 수 없는 ‘심히 큰’ 인생의 돌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굴려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 인생의 돌을 옮겨주십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들은 그날, 절망과 어두움 가운데 있었고 소망이 없는 진노의 자녀들이요, 멸망 받아야 할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우시는 분 계십니다. 죄악 가운데 서성이는 나를 보고 우시는 분 계십니다.
마침내 그 분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로 내몰아 우리 죄를 대신하는 대속 제물이 되게 하는 사랑을 보였습니다. 그 사랑이 무덤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죄악도, 수치도, 사악함도 옮겨버렸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아침, 부활의 날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흰옷 입은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6절). 여인들이 무덤을 찾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기 위함도, 믿기 위함도 아닌 제대로 장례를 치르기 위함이었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살아날 것이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는데 여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실로 믿습니까? 다시 사심을 확신하십니까? 내가 믿는다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내가 믿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시오.
갈릴리로 가십시오
생명의 주님은 그 무덤에 묶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한 여인들은 여전히 놀람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8절).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할 만큼 여인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세상살이의 짐은 무거웠고, 주님을 잃은 슬픔은 너무 깊었습니다.
내 삶을 막고 있는 돌이 너무 크면, 내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우면, 모든 것이 싫고 의욕이 없습니다. 귀에 말이 들리지 않고, 마음에 담기는 말이 없고, 그 당한 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인지상정 아닙니까?
이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을 흔들어 깨우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께서 슬픔과 절망, 의심의 돌무덤에 갇혀 있던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갈릴리로 가라고 했습니다. 왜 갈릴리입니까? 갈릴리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시 사신 주님께서는 내 삶의 현장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내 자존심이 짓밟히는 그곳에, 살기 위해 서러움을 감추어야 하는 그곳에, 살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고 부정을 눈감아버리는 그곳에 오십니다. 오셔서 수치와 눈물, 절망과 한숨도 다 덮어 주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사십시오.
부활을 믿습니까
핸드폰만 있으면 길도, 음식점도 찾고 편지도 보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부활을 정말 믿습니까? 컴퓨터만 있어도 은행 업무를 보고,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시각각으로 알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까?
작은 터널 같은 기계 속에 사람을 넣고 돌리면 어디에 무슨 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 사는 지금,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내 신앙으로 받아들입니까?
고린도전서 15:17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부활의 분명한 사실을 선언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이 부활주일임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부활 신앙을 회복하는 것, 내 인생을 부활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2021번째 부활주일입니다.
또다시 우리는 몇 번의 부활주일을 생전에 맞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주일을 절기로 맞으면 나와 상관없는 공휴일이 될 뿐입니다. 부활은 삶으로 맞아야 합니다.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면 여전히 내 삶은 캄캄한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아침은 밝았는데 나는 아직도 향품을 들고 슬픔에 잠긴 채 죽은 예수님를 찾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십시오.
오클랜드 한인교회협의회 부활절 메시지
부활을 다시 노래하자 뭔가 어수선하다. 정리 정돈이 되지 않은 듯하다. 코로나-19 펜데믹 때문일까? 그럼에도 자연은 어김없이 새로운 계절의 길목에 도착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 민감한 자연은 신진대사의 왕성한 아름다움을 뒹구는 낙엽에서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계절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기후의 변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주님의 부활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너머에 생명과 소망을 잉태하는 하늘의 소중한 뜻, 부활이 있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많은 시와 성서적 배경의 그림과 삽화들을 남겼다. 그는 자연 속에서 다른 세계를 보고, 현재와 영원을 연결하는 순수 정신으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 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속에 무한을 쥐고, 한 토막 시간 속에 영원을 보라. ”그리스도인은 흘러가는 시간의 단면을 잘라 벽돌같이 정형화시켜 놓고 그 안에서 기계적으로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미분적 삶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 그리고 나와 네가 연결된 연속적이고 영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의 기도를 받아냈으나 형 에서의 살기등등함에 위협을 느낀 야곱은 서둘러 작은 행장 하나를 메고 ‘하란’으로 향한다. 집을 나선 첫날밤, 어느 황량한 들판에서 추위와 공포 속에 새우잠을 자고 있던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흔히 말하는 ‘벧엘의 체험’이다.
그는 사닥다리의 꿈을 통해 자기가 누워 있던 거친 땅과 하늘이 터무니없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위대한 영적 체험이었다. 그 사닥다리는 오늘 우리가 다시 체험해야 하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고난 후에 오는 승리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과 저 하늘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현재의 맞닥뜨린 고난과 다가오고 있는 소망은 구별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승리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으면 부활은 의미 없는 형식이요, 생명의 부활이 전제되지 않은 십자가는 단순히 참기 힘든 고통의 순간일 뿐이다.
현재의 십자가는 미래의 부활을 잉태하고,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의 시작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한 줌 흙에서 생명을 보는 사람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봄으로 나를 찾는 사람이다. 십자가 너머에 생명과 소망인 우리 주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소외된 자들에게 소망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 길이 십자가와 부활임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이여, 계절의 길목에서 소외된 자들과 함께 부활의 찬양을 올리자. 코로나-19 펜데믹을 딛고 하늘을 향해 오롯이 서서 생명 가득한 소망의 찬양을 다시 크게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