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사울의 질투”

드라마틱하게 골리앗을 쓰러뜨리며 역사의 무대 위로 올라온 다윗은 그 공을 인정받아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된다. 그렇게 공직에 올라 본격적으로 공적을 쌓기 시작하는데 쌓일수록 치솟는 대국민 지지율! 지지율이 오를수록 사울은 불안해진다. 이윽고 사울의 불안을 자극하는 여인들의 떼 창이 울린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사무엘상 18:7)

11년 전 ‘그림묵상’이라는 첫 책을 출간했다. 읽기 쉬운 짧은 글과 간결한 그림으로 이뤄진 그 책이 당시에 신선했는지 기독교 출판계에서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 뒤로 책은 순항을 타며 총 25쇄(25번 재인쇄했다는 뜻) 되었고 판매율도 늘 상위권에 있었다. 기분 좋은 나날들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그림묵상’하면 독자들이 내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는 것! 내가 무슨 기독교 아트 북의 창시자라도 된 듯 괜히 우쭐해지곤 했다.

5년 정도 지나자 다른 작가들이 하나 둘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그림묵상이란 장르로 새 책을 출간한 신진작가들은 나보다 좋은 글과 세련된 그림으로 더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새로운 세대에게 맞는 감각적인 북 디자인으로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들에게 이목이 쏠릴수록 나는 잊혀지기 시작했는데 판매율도 상위권에서 하위권으로 조금씩 밀려났다. 그러다 결국 신간을 내도 크게 주목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정타를 맞은 것은 2년 전 부산이다. 당시 아는 지인분과 부산을 여행하던 중, 지인 교회 청년들과 승합차에 동석할 일이 있었는데 지인께서 나를 홍보해주고 싶으셨는지 차 안의 청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형제, 자매님들 지금 옆에 타고 계신 이분이 누군 줄 알아요?” 청년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대답했다. “누구신데요?” 나를 소개할 기회가 왔다는 마음에 신이 난 지인은 이렇게 말씀해주었다.

“이분이 바로 그림묵상 작가님이세요! 여러분 모두 이분 책 한 번쯤은 읽어봤겠죠?” 나는 괜히 겸손한척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마음속으로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 거라는 기대를 놓지 않은 채. “아! 왜 그러세요? 저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닙니다. 하하하!”

그러자 한 자매가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림묵상 작가님이셨어요? 나 그러잖아도 엊그제 그 책 샀는데! 지금도 가방에 가지고 있어요! 너무 신기하다! 반갑습니다. ‘김민석’ 작가님! 저 작가님 팬이에요!” 참고로 내 이름은 ‘석용욱’이다.

“그 뒤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사무엘상 18:7)

사울의 질투는 고대 중동에서 막 태동한 한 국가의 왕조만 겪는 일이 아니었다. 권력이 오가는 고위관직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질투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이미 잘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내가 자영업자인데 새로 개업한 옆 가게가 더 번창하여 내 손님들을 빼앗아 간다면 어떨까? 그리스도인이라도 좋은 마음으로 그 가게를 축복할 수 있을까?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각종 사업장은 어떨까? 교회 공동체는? 학교와 직장에서는?

생존권을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아니 더 쉽게 말해 밥그릇 뺏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드는 민감한 상황에서 경쟁자를 축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과연 몇이나 될까?

질투란 로맨스 드라마에만 나오는 소재가 아니며 나 같은 ‘작가’들만의 전유물도 아닐 것이다. 질투는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이며 본능이다.

우리 중 누구라도 사울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사울의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말씀이 폐부를 깊숙이 찌른다. 나보다 주목 받는 신진 작가들을 향한 내 시선을 하늘로 다시 옮겨본다.

사울처럼 되지 말자. 오히려 그 작가들과 그들의 책을 축복해주자. 마음을 새롭게 다짐하며 갑자기 눈에서 ‘똑’ 떨어지는 아쉬움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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