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좋은 곳에 냈어야 했는데…”
‘쪼르륵’ 드립 커피 내려지는 소리에 묻힐 듯 말 듯, 단골 카페 사장님이 볼멘 소리를 한다. 날이 추워지니 장사가 잘 안되나 보다.
슬쩍 눈을 돌려 밖을 내다보니 구석진 자리, 주택가 안쪽, 이 카페가 안 좋은 목에 위치해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늘 오는 손님만 오는 그런 곳이었다. 늘상 보던 얼굴들이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요즘이야 예전하고 달라서 SNS만 잘해도 사람들이 찾아온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장사에는 여전히 자리가 중요하다. 예전보다 조금 격차가 줄었을 뿐 이 기본 공식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집 근처를 둘러본다. 목 좋은 곳에 위치한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들. 대로변 2층 빌딩의 별 다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근방에 있는 고속도로를 염두 한 듯 드라이버인까지 갖추고 있어 차들로 항상 붐빈다. 전략적이다. 그 옆에 꼭 붙어있는 토종 커피브랜드. 일부러 별 다방 옆에만 개업한다는 카페다. 별 다방이 비싸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란 듯이 저가형 커피를 판다. 참 전략적이다.
도서관 길목 또 다른 디저트 프랜차이즈 카페. 요즘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이 카페로 몰린단다. 그들을 겨냥해서 도서관 가는 길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역시나 전략적이다.
부동산에 슬쩍 물어보니 렌트비가 어마어마하다. 그 위치에서 한 블럭 정도만 더 벗어나도 최소한 3배에서 많게는 10배까지 차이가 난다. 벗어난 자리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불과 십 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 정도면 같은 자리로 봐도 무방할 듯 한데 모르는 소리 하지 말란다. 아주 약간만 벗어나도 그만큼 장사가 안 된다고. 목 좋은 자리는 그 만큼의 ‘자리 값’을 한다고. 장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그저 신비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이 정말 있긴 있는 모양이다(참고로 목(牧)의 어원은 고려 성종 때란다. 세금이 운송 되던 통행로에 세운 지방행정기관의 이름이라고 하니 참 오래도 됐다).
이스라엘은 목(牧) 좋은 곳에 위치한 나라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대로에 자리 잡고 있어 국가 운영만 잘하면 각각의 대륙으로부터 이익을 얻어 낼 수 있는 그런 좋은 목(牧)에 있었다. 그 위치가 얼마나 절묘했는지 ‘문명의 교차로(交叉路/junction), 대륙간 교두보(橋頭堡/bridgehead), 교통의 요충지(要衝地/strategic point), 상업의 교역로(交易路/trading post), 세력 간의 각축장(角逐場/heated competition), 권력간의 완충지(緩衝地/buffer zone), 종교의 발상지(發祥地/cradle)’ 등등…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가치를 표현하는 수식어만 나열해봐도 이 만큼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솔로몬 시대에는 각 대륙으로부터 엄청난 무역 이익을 얻어냈으며, 대륙간 권력의 완충지 역할도 톡톡히 했다.
대륙간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해도 길목을 틀어막은 이스라엘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주변국들 또한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를 보냈다. 진정한 축복의 통로가 됐던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이 빈약할 때는 그야말로 열강의 ‘동네북’이 되었다. 두 대륙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양국의 군화에 짓밟히는 호구가 되었고, 때로는 ‘전투의 장’으로 활용 되기도 했다. 자국이 타국의 전쟁터로 활용된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애꿎은 국민들이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유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요충지, 혹은 접경지역에 위치한 약소국들은 국가의 힘이 약할 때는 늘 주변국과의 관계에 얽히고 설켜 긴장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멀리서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불과 60년~100년 전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 그리고 6.25전쟁(1950)같은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길목(牧)은 이처럼 명암의 희비가 극명히 엇갈리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서있느냐에 따라 양쪽을 축복하기도 하고 양쪽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넓은 지구땅 수 많은 천해의 요새들을 놔두고 이 절묘한 위치에 이스라엘을 세우셨다.
이제 한국나이로 마흔 다섯이다. 드디어 중년에 접어들게 되었다. 세대로 봐도 중간이고 개인의 인생 전체로 봐도 중간이다. 그야 말로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돌아보면 젊은 세대에게 쫓기는 것 같고 내다보면 이전 세대에게 밀리는 것 같다.
하는 일도 ‘예술’이어서 직업적 타이틀로 막연한 불안함을 감추기도 힘들다. 때론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거 같아 서글퍼 질 때도 있다.
그러다가 또 완전히 반대의 감정이 들기도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허리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공동체내에서 시니어(Senior)와 주니어(Junior)를 이어줄 수 있는 역할은 나 같은 중간 세대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는 일은 또 어떤가? 교회와 예술을 연결하는 일, 영성과 감성을 이어주는 일. 지난 15년간 열심히 그리고 썼기에 교회 예술가로 버틸 수 있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창작하면 남은 시간도 멋지게 버텨낼 수 있겠지!
오르락 내리락 온도 차를 보이는 내가 마치 심한 변덕쟁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변덕이 심한 성격인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결국 이 극명한 온도 차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핵심요소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 지금 길 목에서의 내 역할도 완전히 바뀐다. ‘이 관계’가 좋으면 양쪽을 축복하는 인생을 살게 되고 ‘이 관계’가 나쁘면 양쪽에서 걸리적 거리는 장애물이 되고 만다.
길 목에 서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고, 교회와 예술을 축복하는 통로가 되려면 결국 그분과의 관계를 더 깊고 친밀하게 다져가는 수밖에 없다. 그 관계 안에서 역할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목에 나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중재(仲裁)’의 역할이 필요한 수 많은 목이 있다.
부목회자의 자리는 어떨까? 담임목사와 성도를 연결해주는 자리 아닌가? 너무 중요한 교회 공동체의 길 목이다. 교사의 자리는 어떻고? 교회와 학생들을 연결해주는 길 목에 있다. 역시 중요하다.
직원의 자리, 상사의 자리, 부모의 자리, 자녀의 자리 등등, 우리 모두는 어느 길 목에 하나 즈음 삶을 걸치고 있다. 목의 위치가 어떻든 사람을 연결하고 축복하는 통로가 되느냐 걸림돌이 되느냐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핵심이다. 이스라엘 왕조 500년이 말해주듯…
당신의 길 목은 어디인가? 거기서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나? 단골카페 ‘목’ 얘기하다 주제가 너무 무거워진 거 아니냐고? 그렇다면 죄송. 남의 가게 걱정해주다 내 걱정, 당신 걱정까지 하게 된 느낌이다.
기왕 이리 된 거 커피나 한 잔 더 주문해야겠다. 목도 안 좋은 카페, 커피라도 한 잔 더 팔아 주는 게 단골의 성의 아니겠나? 물론 아이스 커피 한 잔이 또 생각나서 핑계를 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