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는 그의 저서 “가벼움의 시대”에서 현시대를 “하이퍼 모던 (Hyper Modern)” 시대로 정의한다. 그는 하이퍼모던의 시대 속에서 “가벼운 것”들의 혁명이 일어나 문명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예로, 일상에서 사용되는 물체들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우리의 몸 역시 슬림화를 추구한다. 일보다 레저를, 책보다 영상을, 진지함보다 재미를, 맥시멀리즘보다 미니멀리즘을,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추구하는 사회가 된 원인에는 이 가벼움의 역할이 크다.
가벼움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쉽고 빠르고 편리한 것을 선호하고 추구한다. 그 밖에도 기술, 경제, 건축, 커뮤니케이션, 소비, 심리, 의학, 교육, 패션, 산업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가벼움”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는 경망스러웠던 것들이 이제 크고 무거운 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가히 가벼움의 혁명이라 말할 만 하다.
니체가 말했다. “가벼운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 가벼움은 좋은 것일까? 물론이다. 가벼울수록 쉽고, 빠르고 편리해진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가벼운 짐을 선호하셨다(마태복음 11:30). 그러나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가벼움으로 하여금 우리의 사회를 너머 인간의 존재 가치까지 점령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오히려 그 가벼움은 무거움의 정신을 배양하게 된다.
SNS 발달로 인해 소통은 가벼워졌지만 피로감은 늘고, 개인주의가 강조되면서 인권과 평등을 외치는 소리는 커졌지만, 오히려 더 많은 분열과 분쟁을 초래하고 있는 현상처럼 말이다.
가벼움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경은 가벼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영적인 측면에서 가벼움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가벼움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시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극명하게 나뉜다.
시편 1편의 기자는 악인을 바람에 나는 겨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겨는 가볍다. 겨에는 풍력과 중력을 이길 수 있는 무게가 없다. 악인도 마찬가지다. 고통과 역경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무게가 없다. 가벼움의 문명 속에서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버텨낼 지지대가 없다.
무한 편의주의, 무한 이기주의 등의 사상으로 인해 일어난 파도에 표류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닻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바람을 견뎌낼 수 있는 “무거움”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영광의 무게
요한복음 17장 1절에서 3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 가운데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1-3)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기 원하시는 “무거움”은 바로 영광이다(개역개정의 “영화롭게”는 영어로 glorify를 뜻한다).
영광과 영생
카보드, 곧 히브리어로 영광을 뜻하는 이 단어는 “무거운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우리는 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쉽게 입에 담지만, 그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다. 위의 말씀을 보면, 이 영광이란 단어가 “영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자신을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원하는 목적이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가벼움에는 가변성이 있다. 쉽게 변하고, 쉽게 있다 쉽게 사라진다. 하지만, 무거운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한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생은 무거운 것이다.
그 무거운 것의 근간인 영광은 얼마나 더 무겁겠는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영광과 영생이 우리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아준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갈수록 무게감을 더한다. 그렇게 영광과 영생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할 때, 우리는 진리 위에 서게 되고, 이성과 감정은 쉽게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된다.
영광과 소명
영광이라는 단어와 관련있는 단어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소명이다. 요한복음 12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여기서 영광스럽게 한다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뜻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곧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소명이었다. 그 소명을 성취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영광스러운 삶인 것이다.
소명이 없으면 방황한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소명이 없는 자는 불나방처럼 기회를 따라다닌다. 대세를 따르며 큰길로 걸어간다. 하지만 소명이 있는 사람은 꿋꿋이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소명이라는 무게가 방향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그 영광의 산물인 영생과 소명을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겨와 같은 자들을 양성하는 가벼움의 시대 속에서 표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와 증인으로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