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은 러시아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y)의 장편소설로 1866년 러시아 통보(The Russian Messenger)라는 문학저널에 연재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라스콜니코프(Raskolnikov)는 초인사상에 빠져 인류를 나폴레옹과 같은 비범한 인간과 보통사람으로 나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나폴레옹처럼 비범한 사람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살인해도 오히려 영웅으로 간주된다.

그는 자신도 비범한 인간에 속한다고 믿는데, 그래서 사채업자 노파 알료나(Alyona)를 살인하면서도 그것이 고리대금업을 벌하는 정의로운 행위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연히 살인장면을 목격한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타(Lizaveta)를 함께 죽이게 되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가책에 사로잡힌다. 예심판사 포르피리(Porfiry)가 그를 의심하여 추궁할 때 그는 논리적으로 맞대응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식의 중압감은 점점 깊어만 간다.

그러던 그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온다. 술집에서 알게 된 마르멜라도프(Marmeladov)라는 술주정뱅이의 딸 소냐(Sonya)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녀는 살인을 통해 비범한 존재가 되려 했던 자신과는 달리, 오히려 자신의 삶을 희생해 매춘부가 됨으로써 가족의 생계를 돌보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를 통해 오류를 깨달으며 그녀에게 자신의 살인범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소냐는 자수를 권하며 그녀의 십자가 목걸이를 라스콜니코프의 목에 걸어준다. 또한 그에게 사거리 광장으로 나가 그가 살인으로 더럽힌 땅에 키스를 한 뒤, 자신이 노파를 죽였음을 세상에 알리라고 권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를 수용하여 그대로 행하고 경찰에 자수를 하여 8년의 시베리아 유형이란 벌을 받는다. 소냐는 시베리아까지 따라가서 라스콜니코프의 옥바라지를 하는데, 둘은 사랑 속에서 다시 희망을 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묵상과 교훈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어쩌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셨던 사탄의 세가지 시험에 똑같이 직면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첫 번째 시험: 먹고 사는 삶의 주권
광야에서 사십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한다. 첫 시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누가복음4:3)는 것이었다. 당시 금식으로 몹시 주리셨던 예수님의 인간적 연약함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명기 8:3을 인용하시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심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 소설에서 라스콜니코프는 경제적으로 매우 찌들려 있는 입장이었다. 가난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가진 것을 전당 잡혀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인 알료나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비록 그가 알료나를 살인한 후 훔친 지갑과 패물을 당장 처분하진 않았다 해도, 살인을 유발한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돈 문제였다.

라스콜니코프가 만약 사탄이 예수님께 도전했던 첫번째 시험, 즉,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문제에 맞닥뜨렸다면 그는 여지없이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시험 앞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인생의 대전제를 선포하셨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먹고 살기 위해 불의한 주권을 스스로 행사하고 말았다. 그것이 그의 죄인 된 첫 모습이었다.

두 번째 시험: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두 번째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님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만일 자신에게 절을 한다면 그 모든 권위와 영광을 넘겨주겠다(누가복음 4:6)고 말했다. 이를 단지 허세로만 볼 순 없다. 선악과 사건 이후 사탄은 당초 아담이 가졌던 이 땅의 왕권(창세기1: 26)을 탈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상 임금(요한복음12: 31, 16:11) 노릇을 해온 사탄의 권세는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끝장났는 바, 그 서막이 이곳 유대광야에서 열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누가복음4:8)고 선언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의 본질이 회복되고 하나님만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베드로전서4: 11).

그렇다면 라스콜니코프는 어땠을까? 그는 섣부른 초인사상에 빠져 나폴레옹의 권세와 영광에 미혹되고 말았다. 그 결과 보통사람의 생명을 한 마리 ‘이’에 불과한 것으로까지 무시했다. 그는 누군가 그를 초인으로 높여 준다면 비록 악마일지라도 경배했을 것이다. 그는 타락한 아담의 아류에 불과했다.

세 번째 시험: 하나님을 시험해보려는 유혹
사탄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 보라고 도전한다. 천사들이 떠받든다면 그래도 무사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 예수님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누가복음 4:12)는 말씀으로 시험의 종지부를 찍으셨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직면한 시험은 마치 이런 것과 같았다. 사탄이 그에게 다가와 “너가 만약 비범한 초인이라면 살인을 해도 무사하지 않겠느냐”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험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 자체를 거절하심으로 승리하셨지만,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부풀린 초인의 유혹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뛰어난 지능으로 완전범죄를 계획했으므로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을 자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라스콜니코프가 자신했던 완전범죄는 그 이후 예심판사 포르피리의 의심에 노출되고 말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죄책감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나님 형상의 그림자격인 양심의 가책이 작동한 것이다. 더구나 소냐의 사랑과 접했을 때 라스콜니코프의 차가운 성품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런 라스콜니코프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다. 살인죄, 그에 따른 죄책감, 시베리아 8년 유형의 사법적 처벌. 이 소설의 제목이 ‘죄와 벌’이므로 모든 게 거기서 끝날 듯이 보였지만, 예상을 뛰어넘어 작가는 ‘그 후의 이야기’를 덧붙여 반전을 시도한다.

소설의 끝엔 <죄와 벌>에 이은 <은혜>의 스토리가 펼쳐져 있다. 시베리아 유형 가운데 소냐를 통해 그를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 둘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삶,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처음엔 죄가, 그 이후엔 벌이, 마지막엔 라스콜니코프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가 독자에게 전해지며 감동적인 결말로 끝맺음을 하게 된다.

이방 종교인은 그들의 신에게 뭔가를 더 많이 바쳐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우리에게 임해 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우리가 종종 의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한 싸움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과 의심의 싸움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살아갈 새 삶엔 로마서6:14 말씀이 늘 중심에 있게 되길 소망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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