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이나 대포와 같은 화약 무기가 등장하기 전, 전쟁터에서는 오직 ‘백병전(Hand to hand combat)’만이 유일한 전투방식이었다. 백병전이란 칼이나 창, 활에 의해 벌어지는 근접 전투방식을 말한다. 몸과 몸이 부딪히며 이뤄지는 일종의 난전(亂戰)이었기에 상대를 더 많이 죽이고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 쪽이 승리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혹시나 무협 영화에 나올 법한 화려한 무술가가 있으면 이런 싸움에서 유리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전과 영화는 다른 법, 이런 대규모 백병전에서 출중한 무예 실력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한다. 차라리 무예를 잘 몰라도 전체의 조직력에 흡수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대규모 백병전에서는 훨씬 중요한 병사의 조건이었다.
이런 시대의 전투에서 병사의 조직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진법(陣法/Battle formation)’이라는 것이다. 적은 수로 많은 적을 물리치고 아군의 전투 수행 능력을 효율적으로 끌어올리는 방법.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화약 무기가 등장하기 전 백병전으로 치러지는 모든 전투에는 이 ‘진법’을 중심으로 전투 체계가 발전했다.
그러나 이 ‘진법’을 파쇄하는 핵심 병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기마병(Calvalier)과 전투용 마차(Chariot)’이다(이하 마병과 병거로 표기). 둘 다 말을 활용한 기동력으로 적진을 향해 돌격, 상대의 진을 쪼개 버린다.
진이 쪼개 지면 심리적으로 무너진 병사들이 앞다투어 자신의 위치에서 이탈하고, 그렇게 한 진이 무너지면 그 옆의 진이, 그 옆의 진이 무너지면 또 다른 진이 무너진다.
앞뒤, 좌우로 마병과 병거가 적진을 휘저으면 상대의 진은 완전히 와해되고 진이 와해되면 조직력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다. 그렇게 전의를 상실한 적 틈으로 아군의 창병과 장/단검 병이 뛰어들어 각개 전투로 궤멸시킨다.
이것이 동서양을 막론한 마병과 병거의 활용 병법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육지 전에서 ‘탱크’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에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라.”(열왕기상 10:26)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는 이런 병거가 천사백 대, 마병이 일만 이천 기라고 나온다. 이스라엘 같은 작은 도시 국가가 옆 나라 이집트 같은 제국보다 많은 마병과 병거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사의 미스터리이다(물론 성경에는 그 비결이 나와 있다).
마병과 병거는 원한다고 쉽게 보유 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말이란 예나 지금이나 관리가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드는 동물이어서 아무나 타고 다닐 수도 없고 쉽게 소유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 말과 병사에게 갑옷을 입힌다? 철은 당시 아주 귀한 자원이었고 그 철을 다루는 ‘제련술’은 첨단 기술이었다. 마치 지금의 반도체기술(High technology) 처럼.
대량의 철을 확보하고 높은 수준의 제련술을 가진 나라가 질 높은 기마병도 보유할 수 있었기에 마병과 병거를 몇 기나 보유하고 있는가는 그 나라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척도였다. 그리고 이 척도는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엿보는 적국들을 향한 일종의 ‘전쟁 억지력’까지 발휘하곤 했다. 결론적으로 마병과 병거는 육지 전에서는 탱크의 기능을, 상징적으로는 항공모함이나 핵미사일 같은 무기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무력으로 펼치던 제국주의(Imperialism)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Capitalism)’ 이다. 돈이 곧 마병이고 병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 시대에 부강함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전을 보장하고 내가 강자라는 것을 보여주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존중 받게 만드는 것.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마병과 병거는 무엇에 비유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건물’이다. 부동산 자산으로써의 건물. 쉽게 말해 건물주가 되는 것. 건물 한 채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거기서 나오는 렌트비를 수입 삼아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든든하다.
변변한 노후대책 하나 없는 가난한 예술가로서 건실한 건물 한 채만 있다면 온 마음 다해 의지하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건물을 더 의지하게 될지도. 솔직한 내 심정이다(이래서 건물주가 못 되는 듯).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사무엘상 13:5)
이스라엘은 몇몇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늘 약소국이었다. 블레셋을 포함, 이방 민족과의 영토 싸움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한 적이 거의 없다. 상대는 늘 해변의 모래알같이 많거나 어마 무시한 숫자의 마병과 병거를 동원했다. 이집트를 나올 때(출애굽기)도 그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도(여호수아) 그랬고 사사시대(사사기)에도 그랬다.
인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군대다운 군대를 갖추고 싸운 것은 다윗 왕조 이후‘열왕기시대’와‘1948년 건국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정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늘 약소국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런 주변국과의 크고 작은 전투에 얽히게 하셨을까? 그리고 성경에는 왜 늘 압도적으로 많은 적의 규모와 빈약한 이스라엘 군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그보다 크신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수많은 병사를 동원한 적 앞에서 메뚜기처럼 빈약해 보이는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이 도우시는 한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임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하나님이 더 큰 존재라는 것’이것이 성경을 기록한 이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솔직히 나 자신은 정말 이런 메시지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내 집 하나 없는 세입자 입장이기에, 집주인을 더 크게 보고 높은 빌딩을 소유한 이들을 우러러보곤 한다.
건물주가 되는 것이 잘 못 됐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오해 마시길). 신앙이란 결국 마음의 중심을 다루는 문제이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점검 보자는 말이다. 내 마음은 진정 무엇을 의지하는가? 그림 속 달리는 병거일까? 아니면 그 뒤의 하나님의 손일까? 다 필요 없고 일단 내 집부터 한 채 장만한 후에 점검할까?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편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