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10월 첫째 주 찬송/10월 둘째 주 찬송

10월 첫째 주 찬송/463장(통518) 신자 되기 원 합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 중 하나로 공동체로 드리는 행위를 듭니다. 예배 순서에 있어서 회중찬송뿐만 아니라 교독문도 회중들이 함께하고, 주기도문도 함께하며 신앙고백도 함께 하지 않습니까?

회중들은 찬송을 부를 때 옆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를 느끼도록 융합된 소리로 부르고, 주기도문이나 신앙고백도 음절 음절마다 숨소리를 함께 맞춰가며 한목소리로 드려야 하는 것이죠. 예배인도자가 마이크에 대고 크게 노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 찬송 오른쪽 위 작곡가란에 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가(Afro-American Spiritual)라 되어 있지요? 흑인영가(黑人靈歌, Negro Spiritual)와 같은 말입니다. 아메리카 흑인들이 노예시대에 만든 종교적 민요의 일종인데요,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흑인영가’란 용어가 쓰였습니다. 노래는 훨씬 그 이전부터 불려왔지만요.

흑인 노예선교를 맡았던 감리교단이나 찬송가의 영향으로 보는 이들이 많은데, 구약 성경과 예수님 고난에 관한 내용이 많고 현세의 쓰라린 현실에서 신앙과 상상 속으로 도피하려는 욕구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명랑하고 낙천적인 것도 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유럽의 음악과 아프리카 계통의 선법이나 리듬이 혼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5음 음계를 바탕으로 장음계 가운데서 반음적인 변화, 당김음(syncopation) 리듬 등 그들만의 독특한 특질을 가지고 있지요.

피셔(M.M.Fisher)란 분이 쓴 ‘미국흑인영가’(Negro Slave Songs in the United States)란 책에서 이 찬송의 유래를 밝히고 있습니다. 1748년-1756년 사이, 미국 버지니아의 한 장로교회에서 데이비스(William Davies)라는 분이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요, 흑인 노예 한사람이 설교자에게 뚜벅뚜벅 걸어 와서 “주인 님, 저는 기독교인이 되길 원합니다.”(Lord, I want to be a Christian)라고 했답니다. 바로 이 찬송의 가사 첫 대목이지요.

이 곡의 클라이맥스는 후렴에서 높은 음으로 길게 끄는 “진심으로”(in a my heart)인데, 그야말로 호소력이 넘치죠. 마지막 부분의 “진심으로”도 진정어린 기도임을 표현하는 아멘종지(amen cadence, IV-I)이구요. “아멘”이란 가사는 없어도 “진심으로. 아멘 ”하며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죠.

선창자가 메기고 여럿이 받는 응창(應唱, responsory)형식이니, 메기는 절마다 자유로이 우리의 기원을 붙여보면 어떨까요. “겸손하기 원 합니다”, “온유하기 원 합니다”, “남 섬기기”, “화해하기”, “한 맘 되기 원 합니다”라고요.

10월 둘째 주 찬송/503장(통373)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시는 언어의 예술입니다. 언어학자들은 흔히 언어의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데요, 표시(表示, denotation)와 함축(含蓄, connotation)이 그것입니다.

표시는 언어가 지닌 사전적인 의미를 말하고, 함축은 그 언어가 풍기는 정서, 관념, 암시, 연상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까지를 말합니다.

시어(詩語)의 기능은 주로 함축에 속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시어는 표시의 기능 외에 정서와 상징적인 뜻을 수반하는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언어인 것이죠. 그래서 시는 상상력으로 읽는 것 아니겠어요?

찬송이 바로 시이지 않습니까. 찬송 시는 그때그때 부르는 낱말만 주요한 것이 아니죠. 운율과 더불어 어절(語節, articulation), 구(句, phrase), 절(節, clause)이 노래와 일치해서 시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요, 시행(詩行)까지도 깊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이 찬송을 지은 미국의 유명한 복음찬송작가인 엑셀(Edwin Othello Excell, 1851-1921)은 “이 세상이 죽어가는 것을 너는 아느냐?”(Do you know the world is dying)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죽어가는 이유가 “사랑 없어”서 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이 찬송에서 노래하는 사랑은 뭐 대단한 사랑이 아니고 ‘조그마한 사랑’(For a little bit of love)이지요. 그 조그마한 “사랑 없어” 이 세상이 “냉랭”하고 “탄식 뿐”이고, “곳곳마다 번민함”과 “고통과 근심걱정 많”아 “실망”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아침신문 광고 전면에 실린 울다 지쳐 눈물 맺힌 어린이모습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름은 아옌데, 네 살입니다. 이 아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은 다섯 살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4살이 되고, 5살이 되는 것이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에겐 살아있음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매년 태어나는 아이들 중 5,000천만 명이 필수영양소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5세 미만 아이들 2,000명이 사망하고 있습니다.”

단돈 만 원이면 바짝 말라 뼈만 앙상한 아이 한 명에게 한 달간 음식을 대줄 수가 있다지요. 그들은 우리의 ‘조그마한 사랑’을 필요로 하고 오래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지금까지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 오래 참았네”(They have waited, oh, so long, For a little bit of love.)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While the children, too, are crying, For a little bit of love.)가 바로 그 내용이지요.

bit란 단어가 ‘작은 조각’, ‘소량’, ‘조금’이란 뜻도 있지만 ‘잔돈’이란 뜻으로도 쓰이잖아요. ‘잔돈’의 사랑으로라도 “기갈 중에 있는 영혼”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전 합시다. 눈곱만한 사랑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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