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예순의 나이가 되고 보니

어느 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고민이 너무 많아서 왜 나한테만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거냐고 신께 호소를 했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신도 고민이 많았는데 한번은 이런 묘안을 내놨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한테 있는 불행한 일들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와서 한군데다 모아놓고 대신 다른 사람의 것을 하나 가져가게 했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해 보이고 다 잘된다 하니까요.

세상 사람들도 다 좋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 날, 가지고 있는 많은 불평과 불만 불행 중에 이것 하나만 해결되면 살 것 같은 그런 보따리를 하나씩 싸 들고 모였습니다. 보따리들을 한군데에 모아놓고, 다들 그 대신 하나 가져갈 조금은 가벼운 걸 찾으러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원래 자기가 갖고 온 보따리를 찾으려고 다들 분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려놓은 그 보따리엔 자기가 들고 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불행이 들어 있습니다. 그나마 내 것이 익숙하고 견딜 만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거지요. 행여나 다른 사람이 내 보따리를 들고 갈까 봐 부리나케 와서 들고 왔던 걸 얼른 챙겨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 들여다보면 내가 제일 힘들고 제일 불행한 것 같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다들 저마다의 짐을 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뿐 아니라 내 어려움은 그래도 견딜만하며 지나가면 지나갈 일이라는 걸 깨달아진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힘들 때 나를 생각해.
그러면 위로가 될 거야”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어려움이 있어 완전히 완벽히
행복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니까요.
‘힘들 때는 한 뼘이라도 더 힘든 나를 생각하고 힘을 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게 말하고 싶네요.

내 가난이 그대에게
위로가 되지 않기를
내 고달픈 하루가 그대에게 위로가 되지 않기를
질척거리거나 먼지 나는 땅을 걷는 게 그대에게
위로가 되지 않기를

딴에는 그나마 좀 성숙해졌다고 여기면서 이런 글을 페북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환갑 생일을 지내고 난 지금은 좀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다르게 말하면 그때보다 나는 좀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나랑 생일이 같은 날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남들은 나이 드는 게 싫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매년, 전보다 아주 조금씩이나마 좋은 사람으로 나이 들려고 노력 중이니 오십 대보다 육십 대가, 육십 대보다 칠십 대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건강도, 부와 명예도, 자식들도, 주변의 상황도, 아무것도 마음대로 안 되지만 스스로 조금씩 순해지거나 착해지거나 좋아지는 것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가 드니 이런 것도 깨닫고, 또 실제로 좀 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참 멋지다! 그러니 우린 점점 늙기는 하겠지만, 낡지는 않을 것이다. 지치고 고단한 때에도 내 안의 다른 빛을 찾는 환갑….. 이 나이 참 괜찮다. 이러면 됐다.”

우리는 다 나이 들고 늙어 가지만 그래도 끝나지 않는 장래 희망이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 말입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요. 국제기구 구호팀장으로 일하던 한비야 님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온 부족 마을이 거의 굶어 죽게 된 지경인 오지 마을에 씨앗을 주어서 심게 하고 수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하고 다녔답니다. 먹을 것을 다 충당하기는 너무 어려워서 경작을 돕는 일을 해서 스스로 공급하게 하려는 정책인 거죠.

모든 마을이 다 씨앗이나 종자를 원했지만 그것도 100 퍼센트 제공을 해주지는 못했답니다. 그래서 어느 마을은 씨앗을 심고 어느 마을은 씨앗을 받지 못해 심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몇 달 후에 씨앗을 심지 못한 마을에선 굶어 죽은 사람이 많이 생겼답니다. 씨앗을 심은 마을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굶어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사실은 비가 전혀 내리지 않아서 씨앗을 심은 밭에서도 아무 작물이 열리지 않았답니다. 결국은 씨앗을 심은 마을이나 씨앗을 받지 못해 심지 못한 마을이나 상황은 똑같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식량이 자라날 거라는 희망만 있을 뿐인데도 상황은 너무 달라진 거지요.
희망의 씨앗은 열매가 열리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힘이 됩니다. 바라는 것 만으로요.

어렸을 때 가졌던 원대하고도 기깔나는 장래 희망은 물 건너간 지 오래고, 되고 싶다기보다는 될 수 있는 쪽으로, 아니면 좋아서가 아니라 살려고 하는 일들을 하면서 다소간 쪼그라든 나이 든 이민 1세대로 살고 있지만 다시 희망의 씨앗을 심으려고 합니다. 근사한 것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요.

누구보다 높아지거나, 누구보다 부유해지거나, 누구보다 예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고, 누구에게도 공감하며, 누구한테나 만만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전의 나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릴 때 배우고 손을 놓고 있다가 다시 피아노를 시작한 친구, 미술을 전공했지만 사업으로만 쓰다가 은퇴하고 나서야 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친구, 배드민턴을 더 잘하고 싶어서 아직도 유명선수의 경기 실황을 열심히 시청하는 남편,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차를 세우는 친구, 불면의 밤을 힘들어하면서도 굳이 잠들려고 하지 않고 유화 든 파스텔화 든 그리고 싶은걸 글 쓰는 것처럼 그려내는 친구, 시를 쓰는 친구, 퇴직하면 남편이랑 선교사로 떠나고 싶다며 준비하는 친구.

모두 사랑으로 응원합니다. 예순이어서 못할 것도 없고, 예순이어서 해야 할 것도 없으니까요. 간절히 바라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때입니다..

예순의 나이를 어떤 사람은 두 번째 서른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 번째 스물이라고 하기도 하더라구요. 하지만 예순은 예순이죠. 물론 스물의 싱그러움과 서른의 열정은 늘 그립고 아련하지만 지나왔고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요.

마흔이나 쉰이었을 때 보다 어른스러워진 예순이 괜찮습니다. 친구 말처럼 그러면 됐다 싶습니다. 일흔이 되고 여든이 되어도 잊지 않고 이 희망을 품고 살기로 합니다. 마음에 품은 소망 잊지 않기로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 사랑 안에서”
(에베소서 4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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