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이야기하면 목사가 ‘무슨 과학이냐?”고 하겠지만, ‘신학’이 모든 학문의 으뜸인 것이 당연한 시대가 있었다. 그때 하던 질문 하나가 “천사 여럿이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였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집대성한 <신학대전>에 나오는 질문이다.
동전에 양면이 있는 것과 같이, 허황된 질문이라는 평가도 있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질문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헛된 질문이라는 윌리엄 칠링워스의 평가는 실천하지 않고 말만 하는 교회의 잘못을 꾸짖는 꼭 필요한 아픈 꾸지람이었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질문이 가져온 창의력, 그리고 다양하고 풍성한 논쟁이 정교한 과학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평가는 오랜 역사 속에서 꾸준히 사실로 증명되었다.
현재는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최첨단 과학이 “바늘 끝에서 동시에 춤을 추는 물질”을 증명해 내는 시대가 되었다. 소리도 빛도, 그리고 멈추어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모든 물질도 춤을 추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과학과 종교는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주었다.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같은 말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과학이 사용하는 이성과 종교가 사용하는 신앙이라는 두 날개가 세상을 날아오르게 하는 경우가 지난 역사 속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웨슬리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어 의사의 처방을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원시 의학; 대부분의 질병을 쉽고 자연스럽게 치료하는 방법>(1747)을 만들어 선물한 다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18세기에는, 양자역학 이론만큼이나 생소했던 전기의 존재와 활용법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필요한 물질; 전기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1759)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그때는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100년도 훨씬 이전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전기의 존재조차 모르던 때였다.
목사였던 웨슬리가 전기를 연구한 목적은 분명하다. 의학서적을 저술하여 보급하고, 전기(Electricity)를 연구하던 그 무렵 일기를 보면 알게 된다.
“나는 돈이 없어 약을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품을 공급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다음날 대략 30명이 찾아왔다. 3주 동안 300명 정도였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계속하였는데, 아파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서,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존 웨슬리의 일기에서, 1746년 12월 4일).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공짜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고, 가장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가 전기치료의 가능성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의 종신 교수로서 그동안 배운 학문과 과학을 모두 사용하였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그렇게 노력하는 동안에, 과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들과 과학을 설명하는 방법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의 필요성을 세상에 알리려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고쳐서 그 내용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웨슬리 목사는 이렇게까지 하는 자신의 노력을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하기도 하였다.
신학, 의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고, 청년들을 위해서 영어, 라틴어, 불어, 히브리어 문법책을 만들었고, 읽어서 유익한 각종 고전을 번역해서 출판하였다.
효율이 중요하고 일이 많고 바쁜 세상에서, 웨슬리는 단순함을 강조하는 삶의 방법을 실천하였다. 그 결과가 그 많고 바쁜 생활 속에서 걷고 말을 타고 지구 아홉 바퀴 반, 그리고 설교 4만 번을 실천할 수 있었고, “한 책(성경)의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살 수 있었다.
오늘 하루 웨슬리 목사님의 방법을 한 번 따라 해 보면 어떨까?
(1) 한 시간마다 아주 짧은 기도로 시작하고,
(2) 그 한 시간을 지나기 전에, 감사한 일을 찾아서 감사로 마무리하고, (3) 마무리할 때마다, 지난 한 시간 동안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완전하게 기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4) 한 시간 동안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 간절함을 기준으로 삼아서” 점수를 주는 방법이다.
누구나 그만한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세상을 살아왔다. 웨슬리는 한 시간마다 기도하는 그 방법을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걸음으로 실천하였다.
그것이 사회에서 왕따가 된 가난한 이웃에게 그가 평생 헌신하며 살았던 방법이었다. 그것이 바쁜 세상에서 그가 실천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