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인생은 아름다운 것인가?

‘Love is a many splendid thing’ 한국에서는 ‘사랑은 아름다워라’라고 번역되어 불리던 이 노래는 헐리우드의 당시 유명 배우 월리엄 홀덴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영화 ‘모정’의 주제가로서, 1955년 아카데미 영화주제가상을 받은 노래이다.

젊은 날 학창 시절 우리들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 주던 이 노래를 떠올리며 새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사랑이 그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것인가? 나는 정말 아름답고 찬란한 인생을 즐기며 살아왔으며 또 살아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뉴질랜드 목회 시절,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을 읽으며 그 책의 매력에 빠진 적이 있다. 주인공 조지 도슨(George Dawson)은 미국의 흑인 노예 후손으로서 아이들이 10명이나 되는 집안의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교는 가 보지도 못했고 물론 글도 읽을 수가 없었다. 88세가 될 때까지 수많은 직업에 종사하며 오로지 노예처럼 일만 했던 누가 봐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98세에 처음으로 글을 배워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희와 삶의 희열을 느낀다. 이 기사를 읽고 찾아온 한 평범한 교사를 통해 그의 오랜 103세까지의 삶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어 미국사회에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Life is so Good’. 이것이 그 책의 이름이다.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것‘. 어떻게 그는 이런 인생 찬가를 노래할 수 있었을까.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로 인한 공포가 여전히 세상을 엄습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미국에서 발생한 한 흑인 청년 조지 프로이드(George Floyd)의 안타까운 죽음은 단순히 미국 사회의 문제로 넘길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누가 진정한 이웃일까.’ ‘내가 선택한 자만이 진정한 나의 이웃일까.’ ‘이웃과의 관계가 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일까.’

한국에서 상영된 ‘버틀러(Butler)-대통령의 집사’라는 영화를 감상한 적이 있다. 백악관에서 34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을 모시며 시중을 들었던 한 흑인 집사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영화 속의 인물 ‘세실 케인즈’는 노예해방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던 백인들의 흑인차별에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한 충실한 하인일 뿐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백인 목화농장 주인에게 겁탈당하고 아버지는 아내의 일로 주인을 쏘아본 것만으로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목격한 아들이다. 그의 가슴에 피맺힌 절규를 안고 도시로 나가 살아남기 위해 주인에 충성하는 비결을 배우고, 결국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모시는 흑인 집사가 되기까지 그는 출세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가 행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기 아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자신의 속마음과 눈과 귀를 감추고 살아가는 아버지에 반항하던 아들 루이스가 흑인 인권운동가가 되면서 서로 반목하는 부자 사이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며 다시 포옹하는 장면은 보는 이를 감동케 한다. 자신과 죽은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아들 루이스와의 관계를 통해 주인공, 세실 케인즈의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많은 영화평론가에 의해 흑인 인권에 관한 영화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이 영화가 말하는 또 하나의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일면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나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고 싶어 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사람은 욕구충족만으로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와 명예와 권세가 행복의 전제조건일 수 없음은 이 모두를 갖고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만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까, 왜 그들이 행복과는 거리가 더 멀어 보이는 것일까.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역경과 공포 속에서도 인생은 참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관계 속에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을 먼저 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창조주시며 조물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다. 인간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의 관계다.

그다음은 이웃과의 관계다.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심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여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형상을 닮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나의 이웃과의 인간관계가 나의 행복을 좌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외에 모든 사람이 다 나의 이웃이다. 내 가족이나 옆집 사람만이 이웃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와 모습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내 이웃임에 틀림없다.

충청도의 한 농가에 어떤 소년이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형은 큰 도시로 유학을, 그리고 누나는 출가하면서 외톨이가 되었기에 그의 불행은 예고된 것이었다. 새엄마가 데리고 들어온 동생과 새로 태어난 동생들 틈에서 계모의 학대가 심해지고 그는 혈혈단신으로 집을 떠나고 말았다.

후에 일본에서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시작했지만 전쟁 말기의 폭격 속에서 또다시 가족을 이끌고 현해탄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고 돌아온 고향 땅은 낯설기만 했을 것이다. 더욱이 평생을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아내와 달리 그는 예수를 외면하고 살았기에, 누가 감히 그를 향해, ‘당신의 인생은 아름다웠군요’라고 말 할 수 있었을까? 말년에 주님을 영접하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평생을 가족들과도 불편한 관계였을 것을 생각하면 행복과 불행이 어디서 오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관계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즉 겉으로 보이는 나와 나의 속사람(inner being)과의 관계를 말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로마서 7: 22-23) 속사람이 가진 마음의 법과 언제나 충돌하며 살아가는 겉 사람, 결코 그의 인생이 아름다울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관계가 원만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살아간다면, 그 삶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중 한 가지라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비뚤어지고 마찰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마음의 평화는 사라지고 불안과 초조, 미움과 증오, 두려움과 공포가 내 삶을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Life is so Good’, ‘Life is a many splendid thing’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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