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이란 자기 얼굴을 자기가 스스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러나 말은 쉬울지 모르지만 아무나 자화상을 그리지 못한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는 인상파의 대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은 미술사에 남는 그림이겠지만, 자화상을 그렸다고 다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에 그린 자화상도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시인 윤동주가 1939년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쓴 시 ‘자화상’이다. 우물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마음에 그린 자화상은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고흐의 그림에 뒤지지 않는 명화 같다. 이 시를 읽으며 독자들은 22세의 젊은 청년 윤동주의 당시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 자화상이 시인의 솔직한 감정들을 담은 얼굴을 보게 하는 한 폭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대대로 세도를 가졌거나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은 초상화를 남겼다. 초상화는 자화상과 달리 남이 그린 그림이기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정하거나 몇 번씩이라도 다시 그리게 할 수 있는 물건이다. 마치 요즘 세상의 ‘포토샵’ 기술로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인물사진으로 바꿀 수 있듯이 말이다.
자화상이 갖는 의미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아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어떻게 보고 어떤 평가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세계와 자신이 품은 마음을 표출하여 나타내 보인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거울을 볼까? 그렇다면 나는? 거울을 볼 때 어떤 생각들을 할까? 외모에 자신감을 느끼고 뿌듯한 자부심으로 언제나 당당한가, 아니면 거울 보기가 민망스러워 얼른 거울을 내려놓던지 거울을 외면해버리지는 않는가. 그러나 무엇이 그곳에 비칠지라도 진정한 자기모습인 참 자화상은 거울 뒤편에 숨겨져 있는 속사람, 마음의 거울에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진정 나는 누구일까?
내가 처음 남미로 갔을 때 ‘어쩌다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까지’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내가 어떻게 보인다는 말이었을까. 뉴질랜드에서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오랜 해외 생활을 뒤돌아보며 쓴 자전 에세이 원고를 받아 본 한국의 여러 유명 기독출판사에서 보내온 답신은 ‘글은 아주 잘 쓰셨는데 목사님의 지명도가 낮아서…’ 결국 친구가 소개한 서울의 한 일반출판사를 통해 ‘타스만의 파도’는 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일까, 너 이름이 뭐니?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세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잊어버린 어린 유아기의 일본식 이름, 그리고 한국 이름, 또한 영어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나의 자화상일까? 아니면 누가 그려주는 나의 초상화일까?
오늘날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는 한마디로 정체성의 위기에서 오는 문제다. 자신의 이름은 내세우면서도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방황하는 사람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자기소개서에 당신은 무엇을 가장 먼저 쓰겠는가? 그 자랑스러운 학력에 가슴 뿌듯한 경력들과 지금도 소중히 명함 위에 올려놓는 각종 타이틀을 내세우고 싶은가?
명함 한 장으로 모자라 두세 개의 명함을 갖고 다니며 나를 뽐내고 싶은 당신인가? 진짜 나는 이력서에 소개된 ‘나’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수밖에 없는 속일 수 없는 나의 속사람일 뿐이다. 이름에 가려진 가면을 벗어 던져버려야겠다.
인간에겐 바라봄의 원칙이 있다. 누구를 늘 바라보면 결국 그 사람을 닮아간다는 말이다. 누구나 자신이 닮기를 원하는 인생의 아름다운 모델이 있다면 그를 닮아가고 그의 얼굴이 나의 자화상과 겹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보이는 내 모습이 아니라 그분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모한다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 환하게 마음에 품을 수 있고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때 나의 자화상은 그 사람의 자화상과 닮아갈 것이다.
바울은 여러 신체적 결함을 가졌었지만 이를 감추거나 누구를 원망치 않았고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이 받은 큰 은혜임을 깨달았으며, 그의 이력은 당대에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단한 신분의 소유자였지만 그 모든 이력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크리스천의 자화상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야 하고 그래야만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구를 닮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의 얼굴 모습대로 내 얼굴을 성형하여 뜯어고친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따른다는 말이다. 크리스천의 자화상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내 마음의 거울에 비친 자화상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 5, 6, 8).
예수의 마음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툼과 불화가 어디서 오는가? 원망과 시기 질투는 어디서 오며, 미움과 증오는 왜 생기는 것일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뿌리에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겉으로는 머리 숙이고 겸손의 모양은 보일 수 있어도 속으로는 교만할 수 있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으로 가득할 수 있다. 자신의 눈 속에 든 들보는 알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작은 티를 보고 흉을 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남의 신앙은 엉터리 같고 내 신앙만이 제일이라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신앙의 교만에 사로잡힌 자신의 믿음 꾼들로 인해 교회가 폄훼된다면 너무나 슬픈 일이다.
내가 얼마나 멋있게 보이는지가 대단한 일일까. 곱게 화장하고 분 바른 가면을 쓴 내 얼굴의 자화상이 아니라, 먼저 예수의 마음이 내 속에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다. 그때 나의 자화상은 예수의 자화상을 닮아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