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12월 31일, 딸아이가 새해맞이 스카이타워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고 조른다. 그럼 빨리 자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8시에 아이들을 잠자리로 보낸다. 밤 11시 30분,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차에 싣는다. 불꽃이 혹여나 도착하기 전에 터지면 어떡하나 혹여나 엄청난 인파로 인해 불꽃은 구경 못하고 사람과 차만 구경하고 끝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조급한 마음에 속도를 맞춰 고속도로 위를 주행한다.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하고 주차할 자리를 찾아 자리를 마련한다. 카운트다운에 맞추어 숫자를 외치며 마침내 새해를 밝히는 폭죽이 터진다. 폭죽 자체에는 그리 감흥이 없었지만, 우리 가족에게 2020년의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준 것이 가장으로서 뿌듯하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족들끼리만의 송구영신의 모습. 몇 년 동안 걸어왔던 좌충우돌의 이야기들이 기억 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유학을 가고 싶었다. 솔직히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목적보다는 선배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후배들이 간다고 하니까 나도 그 구색에 맞추어 가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특별히 영어는 잘못하지만, 영어로 목회를 하고 싶은 간절한 소원에 혹시나 유학을 가면 영어로 목회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라는 막연함이 유학을 그리고 외국 생활을 동경했던 것 같다.
그런 소망 속에서 우연하게 뉴질랜드 광림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청빙 공고가 수업 중 교수님을 통해 들려왔다. 마음속에 혹시 이것이 주님의 이끄심이 아닐까라는 마음에 솔직하게 쓴 이력서 한 장을 통해 나와 뉴질랜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대학원을 마치지 않고 휴학을 하고 온 뉴질랜드인지라 1년간의 아쉽고 짧은 사역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저 맑고 푸른 하늘과 추억의 뉴질랜드의 향기가 간간히 바쁜 일상 속에서 흘러나왔지만,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은 그저 마음일 뿐 행동으로는 옮길 용기는 없었다.
그런 일상 속에 결혼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을 하고, 부목사로 사역을 하던 어느 날, 다시금 뉴질랜드로 가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2013년 5월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놔둔 채 먼저 답사를 왔다(답사라고 쓰고 정착이라 읽는다).
보장된 사역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현지 학교에서 공부할 만한 영어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지만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엘림교회 바이블 컬리지. 마침 공개수업 주간이라 그 짧은 일주일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이곳이라면 유학을 위한 유학이 아닌, 목회를 위한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확신에 교회와 가족에게 상의하지 않고 영어 입학시험을 쳤다. 커트라인 26점, 시험 결과는 25점. 마음은 정해졌기에 교회를 사임하고 한국의 살림을 정리해야 하기에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불합격이지만 대기번호를 받아놓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합격했으니 입학해야 한다는 믿음의 선포를 한 뒤 다시 일주일 만에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학교에서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고 요청하여 다시 똑같은 문제로 시험을 봤는데, 결과는 다시 25점. 일주일 동안 국제학생 담당자(International Student Dean)를 좇아다닌 결과 가까스로 입학허가를 받았다.
학교에서 매일매일 드려지는 예배, 모든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나누어야 하는 짧은 영어 메시지, 매 주일 신학교와 친분이 있는 지역교회에 가서 예배 전체를 주관하는 예배 실습 속에서 이것이 행복임을 느끼며 매 순간을 음미하며 뉴질랜드를 즐거이 누렸다.
또한 혼자만 행복하면 안 되기에, 아내가 한국에 있을 동안, 한 주간 아내가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정리하여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에 이르기까지 빡빡하게 스케줄을 만들어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동네 여기저기를 함께 걸으며 뉴질랜드와 한국의 다른 점을, 앞으로 우리 가족의 미래를, 그리고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가족 산책시간 속에서 힘과 위로와 소망을 얻었다.
신학교 1년 과정 뒤에 얻은 1년의 인턴쉽의 기회, 그리고 정식 고용.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배워야 할 것도 많았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공동체의 문화 속에서 내가 그동안 가졌던 것들을 비워야 하는 과정은 배우는 것만큼 쉽지 않았다.
매년 새해 첫 주에 담임목사는 휴가를 가서 보이지 않고 부목사가 설교를 하는 장면, 빳빳하게 준비된 지폐를 미리 준비하여 정성스럽게 봉투에 담아 드리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카드단말기에 본인이 헌금한 영수증을 일관된 봉투에 담아내는 모습에 함께 인턴으로 일하는 동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안 보인다고 불평했던 적도 있다.
반대로 담임목사부터 시작해서 모든 목사들이 아침부터 나와 예배준비를 위해 의자정리를 하는 모습, 설교를 적어도 목요일까지는 끝마치고 설교노트를 완성하는 부지런함, 토요일에는 웬만하면 교회 행사를 만들지 않고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기를 당연히 여기는 생활방식, 사역 자체보다는 그 사역을 섬기는 사역자 본인과 가정에 더 많은 관심과 신경을 쓰는 목회자들 간의 목회 돌봄에서 가족과 사역 속에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문제가 있는 법, 지상낙원인 뉴질랜드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문제는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분들이 키위 교회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리고 세대주의 신학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겉에서 보이는 모습과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앙이 없거나 변질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키위 교회가 정답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한국교회에서 이어져내려 온 기도의 열정과 말씀의 열심은 키위 교회에서도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키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한인 공동체를 공식적으로 섬긴 지 벌써 5년, 한국에서는 한 번도 써보지 않았던 계약서를 통해 목사 역시도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속에 노동법으로 보호를 받는 노동자임을 깨달았고, 담임목사와 부목사는 주종관계가 아닌 동등한 입장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서로 돕는 팀이라는 것도 배웠으며, 목회와 가정생활의 균형 속에 아내와 자녀들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됨에 따라 관계가 건강해지고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는 것도 경험했고, 성도들과 일정한 관계의 선을 긋는 필요성과 어느 부분 쉬는 날일 때는 장례나 긴박한 상황 외에 이메일이나 전화도 받지 않는 사역 방식이 장기적으로 옮았음을 깨달았으며, 아내와 아이들이 아프면 무조건 교회에 가기보다는 가정을 먼저 돌보는 것도 배울 수 있었던 귀한 여정이었다.
권위로 군림하는 자리에서 맡겨주신 자리가 내 것이 아니요 섬기는 자리임을 아는 배움의 여정. 생존을 위한 목회가 아닌, 목회를 위해 생존함으로 부르심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을 보는 배움의 여정.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배우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배움의 여정. 완벽한 이가 목사가 아닌, 최선을 다함으로 완벽으로 가는 여정에 모든 이들이 서 있음을 깨닫는 배움의 여정.
먼저 비워야 채워짐을, 하지만 그 비움이 그리 쉽지 않고 때로는 고통스러움을 고백하는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나눠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