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존 웨슬리의 지지를 받던 젊은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하였다. 존 웨슬리는 88세 나이로 마지막 힘을 다해서 윌리엄 윌버포스를 지지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낸 일 주일 뒤에 웨슬리는 세상을 떠났지만, 윌버포스는 그로부터 42년 뒤에 수 많은 감리교인들(Methodists)의 지지를 받으며“노예 금지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f/Wilberforce_john_rising.jpg,
평생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웨슬리라고 특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서(clue)가 있다. 그의 어린 시절과 평생 삶에서 조금씩 드러난다. 그 때는 평균 생존 나이가 36.6세였다.
신생 도시였던 리버풀과 맨체스터에서 생존 할 수 있는 나이는 더 적었다고 한다. 생존 자체가 특별했다. 일이 고되고 힘들고 안전 규칙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때,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았다.
열악한 공장과 탄광에서 특히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고통받는 시대였다. 기술이 발달하고 자본이 축적되는 만큼, 풍요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늘어갔고, 대륙 반대편의 조선도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도 아프리카도 전 세계가 아픈 시대였다. 그 시대를 관통하고 나온 웨슬리의 삶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았다.
어린이는 누구나 영재이면서 각자 특별하다. 존 웨슬리가 생각을 많이 하고 규칙을 잘 지켰다고 하지만, 엄격한 부모 밑에서는 대개 그렇게 자란다. 웨슬리도 다른 어린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닌 것도, 공부 밖에 다른 세계를 몰랐던 그에게는 당연하였다. 어떻게 보면, 세상 경험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었기 쉽다.
그런 웨슬리에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평생 잊지 못하던 만 6살 어린 시절의 경험이다. 한밤중에 일어난 불길 속에서 죽을 뻔하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2층 창문을 통해 구출되던 순간에 지붕이 무너져 내려앉았다고 한다. 그때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스스로를“불에 타다 남은 조각”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조각조각 깨어지는 연약한 존재라고 자신을 생각했다. 단단한 나무가 아니라 까맣게 탄 숯이 되고 잿빛만 남은 재가 되어 바람만 불어도 흩어지기 쉬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연약한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
연약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그 하나의 일이다. 웨슬리의 암호 일기 첫 권에 적어 놓은“평생 모든 일에 적용할 일반 규칙 하나”에서 그 연약함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의 일은 약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많은 일을 할 수 없고 하나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웨슬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백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설교로 표현되었다. 하루 단위가 아니라 시간을 단위로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려고 노력하던 무렵이었다. 1730년 11월 15일 주일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있다.
단 한 시간도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과 “악의”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매 시간마다 기도하였던 이유도 연약함에서 시작하였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어느 한 순간 침범해 들어오는 온갖 분주함을 경계해야 했다.“친절과 불쌍히 여김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던 이유도 연약하였기 때문에 시작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방법이었다.
죽을 만큼 간절했던 일
한 시간마다 일기를 쓰며 자신을 점검했던 웨슬리는 평생 죽음을 각오하고 살았다. 어린 시절 화재 사건만 아니었다. 나이 만 50세가 되었을 때도, 유언을 남길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 모든 일을 멈춰야 했고 4개월 동안 설교도 중단해야 할 정도였다. 무덤 묘비에 남길 말도 그때 적어 놓았다.
여기 존 웨슬리의 타다 남은 조각, 그 육신이 잠들다. 나이 51세에 결핵으로 죽은 사람. 빚을 갚고 나면 10파운드도 남지 않은 사람; 아무 쓸모 없는 종에게도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기도밖에 드릴 것이 없다.
“불에 타다 남은 조각”으로 깨지기 쉬운 연약한 삶을 살았다고 마지막 고백을 하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실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아무리 해도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때, 유언을 작성하는 웨슬리의 마음은 죽음의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죽음을 준비해본 사람에게는 달라지는 것이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그 다음부터는 당장 숨을 거두더라도 후회 없을 만큼 진심으로 세상을 살게 된다.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런 진심 또한 날마다 자신을 경계하고 돌아보며 기도하지 않으면 물거품처럼 어느 순간 아득하게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그래서 웨슬리는 매 시간마다 죽을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가 “방법(Method)” 으로 선택한 “한 시간”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허락된 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암호 일기 가운데 <꼼꼼한 일기>에는 그만큼 간절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단 하루라도 그 삶을 따라가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간절했다.
죽을 만큼 연약해도 할 수 있었던 일
그렇게 오직 하나에 목표를 두었던 웨슬리는 평생, 지구 9바퀴, 다시 말하면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걷고 뛰고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현장을 방문할 수 있었다. 4만 번의 대중 설교, 200여 권의 저술, 학교 설립, 교육과정 설계, 과학 서적 출판, 의학 서적 출판, 웨슬리 문고 출판, 각종 사회봉사 활동 등을 나이 88세까지 계속하였다.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기준으로 삼던 세상의 기준을 뒤집어 놓았고, 지식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지도자로 세웠다. 18세기 노예 해방 운동은 목숨을 걸고 계속했던 그의 평생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