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정말로 네가 말을 하고 있는 거니?”
“그래, 그러면 누가 말을 했다고 생각했니?”
라임오렌지 나무는 조용히 웃었다.
“나무야! 도대체 너는 어디로 말을 하니?”
“나무는 몸 전체로 이야기를 한단다. 잎으로도 하고 가지와 뿌리로도 한단다. 들어 볼래? 네 귀를 나의 몸에 대 봐. 그러면 내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제제(Zeze)가 라임오렌지 나무와 첫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제제는 다섯 살의 아동으로서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가난과 학대를 겪어야 했다. 그럴 때 라임오렌지 나무 밍기뉴(Minguinho)는 제제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둘만의 대화를 나누며 힘이 되어주었다.
어린 제제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는“나의 라임오렌지 나무”(My Sweet Orange Tree)는 브라질의 작가 조제 마우로 지 바스콘셀로스(Jose Mauro de Vasconcelos)가 1968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자.
제제는 실직한 아빠와 공장에 다니는 엄마 그리고 세 누나, 형, 동생과 함께 살았다. 제제는 소문난 악동이었다. 제제는 자기 속에 작은 악마가 있어서 자길 언제나 나쁜 길로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제제는 가족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아빠는 가끔 제제를 아주 심하게 매질했다. 옷을 벗으면 제제의 몸엔 멍과 구타 자국이 가득했다. 제제는 아빠에게서 아버지의 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제제에게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 이는 포르투갈 사람 뽀르뚜가(Portuga)였다. 제제의 악동짓이 인연이 되어 알게 된 뽀르뚜가는 제제가 발을 다치자 병원치료를 받게 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제제는 뽀르뚜가에게 아빠를 죽일 거라고 말한다.“벅 존스의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마음 속에서 죽이는 거에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렇게 되면 언젠가 완전히 죽게 돼요.”
그런 뽀르뚜가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의 차가 열차와 부딪친 것이다. 그 충격으로 제제는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다. 제제는 아기 예수에게 뽀르뚜가를 잊지 않도록 자신도 그 기차에 치이게 해달라고 빌었다.
제제는 머잖아 밍기뉴와도 헤어져야 할 상황이다. 도로확장 공사 때문에 집 뒤뜰 도랑 옆에 있는 밍기뉴를 베어버려야 한단다. 밍기뉴가 하얀 꽃을 피우자 제제는 그것이 밍기뉴의 작별 인사라고 생각한다.
제제는 아픔이 뭔지 배워간다. 제제에게 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뽀르뚜가에 이어 밍기뉴…..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대상이 다 떠나버린 채, 그렇게 제제의 유년기가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에 48세의 어른이 된 제제가 등장한다. 그는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사랑하는 뽀르뚜가!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처럼 고통스러워했나 봅니다.”라고 독백하며 끝맺음을 한다.
이 소설에서 제제의 가족은 아빠의 실직으로 모두가 혹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실직한 아빠 자신이 그 때문에 가장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점을 헤아린다고 하더라도, 아빠와 다른 가족들이 어린 제제를 다루는 방식은 너무 가혹했다. 내가 힘들다는 것이 제제에 대한 학대를 정당화시키는 이유가 될 순 없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40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가르치셨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우리가 돌볼 때, 그 작은 자 하나가 곧 예수님 자신이란 말씀이셨다.
작고 연약한 자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가장 무시되기 쉬운 존재다. 그들은 함께 보탤 힘조차 없다. 도움을 입어도 도움을 되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사람을 먼저 돌보라고 말씀하신다.
이 작품에서 제제가 바로 그런 처지에 있었다. 가난은 가혹했다. 어른이든 아이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럴 때 가족들은 가장 작은 제제를 무시했다. 자신들도 힘들다는 이유로 제제의 작은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아니, 헤아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모진 학대마저 일삼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주님은 그분의 삶으로 친히 말씀하신다.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유아가 되어 말구유에 누이신 바 되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더할 나위없이 존중되었다. 동방에서 찾아온 3명의 현자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게 하시고, 들판의 목자들을 불러 경배하게 하셨다.
가족들 사이에서 철부지 제제는 연탄재처럼 발에 툭툭 채이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런 가족들에게 안도현의 시“너에게 묻는다”를 들려주고 싶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반쯤 깨진 연탄 /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가족들이 아빠의 실직으로 반쯤 깨진 연탄 신세가 되었다 할지라도, 언젠가 함께 활활 타오르고픈 연탄의 희망을 품었다면 제제의 악동 모습에서조차 소담스런 희망의 불씨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어보자. 그렇다면, 제제의 마음속에 있던 작은 악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다시피, 제제는 말썽꾸러기였다. 제제 자신은 그게 마음속에 있는 작은 악마 탓이라고 여겼다. 그 놈이 발을 걸면 제제는 언제나 넘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 제제를 아빠는 매질로 다스렸다. 그러나 매질은 제제의 마음속에서 아빠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갔다. 악마가 더 좋아하는 환경이 되고 만 것이다. 매질이 아니라면, 제제의 악한 행실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제제가 형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지금의 악마 소년 대신 착한 아기 예수가 내 마음속에 태어났으면 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뽀르뚜가의 사랑으로 응답해주셨다. 제제의 마음속으로 뽀르뚜가가 베푼 아버지의 정이 흘러 들어왔을 때 작은 악마는 어느덧 사라지고 말았다. 다섯 살 꼬마 제제에게 라임오렌지 나무 밍기뉴는 둘도 없는 말벗이자 친구였다. 밍기뉴는 슬픔에 빠진 제제에게 위로를 주었고, 절망하는 제제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이 작품은 필자에게도 밍기뉴 같은 벗에 대한 더욱 깊은 갈증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정작 내게 다가온 하나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질문을 바꾸길 원하셨다. “나의 밍기뉴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의 밍기뉴인가?”로.
누가복음 10장에 예수님의 그 음성이 담겨 있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되물어보셨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하얀 꽃을 피우며 제제의 곁을 떠나간 밍기뉴는 제제가 어서 성장하여 또 다른 제제의 밍기뉴로 살아가길 바랬을 것이다. 책을 덮자, 내게도 그 교훈이 조용히 스며든다. 나도 이젠 누군가의 뽀르뚜가, 누군가의 밍기뉴로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