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는 다문화 사회이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지만, 아직도 내가 초등학생 때 들었던 “칭총 차이나, 칭총챙총”하는 친구들의 장난 섞인 노래가 기억에 남아있다.
이방인으로 뉴질랜드에서 정착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1.5세대이기 때문에 뉴질랜드 문화에 익숙하지만, 어렸을 적 어렴풋한 기억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다른 문화와 언어를 지닌 다른 나라에서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 뉴질랜드로‘이주’하면서 겪은 어려움들이 있기 때문인지 어딘가에서 어디로 이주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내게 주어진 것 같다. 그래서 다문화 가정, 북한 이주민, 조선족 등 각 나라에 있는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마음이 크다.
2000년대에 국제결혼이 급증하며 한국 사회 가운데 결혼 이주 여성의 수는 약 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다문화 사회이긴 하나 한국 사회는 인종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보긴 어렵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 안에서‘여성’이라는 이유로 이주 여성들은 통제되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
- 동남아시아인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이고 열등하다는 생각.
- 피부색이 어두운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감각
- 결혼 이주여성은 돈 때문에 한국에 왔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경멸 어린 시선
이러한 인종 차별과 성차별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며 이주 여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외당한다. 이런 이주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대전으로 내려가서 이주 여성 및 다문화 가정을 위해서 사역하는 교회와 연결되어 향초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말을 잘하는 분들과는 대화도 잘 통하고, 소통이 되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일 뿐이었다. 대부분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소통부터 어려웠고, 그 외에도 가정폭력 및 여러 가지 아픔들이 그들의 마음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이주 여성은 가정폭력으로 인해 이혼소송에 들어갔지만, 이혼이 쉽지 않아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다. 이 이야기 안에만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었다. 처음에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이주 여성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었고, 법정 다툼에서 패소했다.
두 번째는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억압이 존재했다. 그 여성은 이혼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남편이 법을 악용해 이혼해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자를 내주지도 않은 채 그 여성을 불법 거주자로 지내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이주 여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남편의 학대에 계속해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방문했던 대전 이주민센터에서는 이혼소송 가운데 있거나, 법적으로 싸움을 하고 있는 이주 여성들을 위한 변호사 선임 및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한 단체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없다. 언어 교육, 문화 교육, 상담, 법적인 조언 등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싶어도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쉽지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노숙인들도 마찬가지다.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물품 및 경제적 지원, 자활, 상담, 교육 등등 종합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자본이 뒷받침되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더라도 각 단체가 한 부분씩 섬기면서 연합의 장이 이루어지기를 바래본다.
뉴질랜드는 다문화 사회이다. 많은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고, 매년 천 명의 난민자들을 받고 있다.
다양한 국가에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뉴질랜드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다. 노동 착취 등 이주자들을 향해 다양한 형태로 억압과 고통이 가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주자들이다. 그래서 이주자들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주어지는 것 같다. 우리 주변에 있는 한인들, 다른 인종의 사람들, 난민들, 섬나라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될 수 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누군가가 나와 함께하고 있구나’에서 오는 위로가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