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함부로 부르면 안되는 호칭, 형 그리고 언니

새로운 땅,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온 뉴질랜드 이민, 이민이라는 새로운 삶속에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이민자들은 그 관계속에서 서로의 도움을 주고 받으며 녹록치 않은 이민생활을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

진실된 관계, 서로 가족은 아니지만 어쩔때는 가족보다 더 친밀한 관계, 그 복된 만남은 어쩌면 이민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관계는 잡초처럼 저절로 자라나지 않는다. 도리어 공을 들이고 가꾸고 보호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열매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로 간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외로운 이민자의 마음, 그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이민자는 또 다른 이민자를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 외로움이 해소되고 공허함이 채워지면 좋으련만 이상하게도 이민사회에서는 이 관계라는 운전길이 얼마나 험하고 가파른지, 크고 작은 사고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넘지 말아야 할 중앙선을 넘어서일까? 깜빡이를 넣고 들어와야 하는데 갑자기 훅 들어와서일까? 아니면 한국에는 없는 라운드 어바웃 같은 뉴질랜드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도로 때문일까?

아무리 운전을 잘한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실수로 그리고 본인의 부주의로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사고가 나서는 안되겠지만 이 도로에서 일어난 사고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필자 역시도 관계의 도로를 매일 지나고 있지만 아직 이 도로에선 Full License를 취득했다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또한 모든 이들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에 오늘도 배우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아본다.

필자는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때 비자 신분이 ‘학생’이었다. 한국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난 이후에 거의 내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기에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가 목사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목사는 은퇴해도 목사, 목회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도 목사, 부모님들은 ‘김목사 밥은 먹었냐?’, 장인 장모님은 ‘요즘 김목사 어떻게 지내?’라는 목사호칭의 일상에서 벗어나 이름으로 불리는 뉴질랜드의 이민생활은 나에게 호칭이 얼마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한국문화에서 호칭은 관계의 안전거리라고 생각한다. 호칭이 한번 정해지면 너와 나는 흐려지고 그 호칭에 맞는 관계설정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주 보고 식사도 같이 함으로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형이라고 부르거나 언니라고 부르면 관계속에 곤란한 상황이 생길때가 있다.

사실 이민자들은 이민이라는 공통점만 빼고는 모두 생면부지의 사람들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게 되기까지 어느 정도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형의 의미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형의 의미가 다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언니라는 호칭의 기대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기대가 다를 수 있다. 언니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언니, 돌봄을 받고 싶어 하는 동생이 만나 충돌을 일으켜 사고라도 나면 서로 마음에 생긴 멍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차라리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처음 만났을 때 형이나 언니라는 호칭을 너무 급하게 부르지 않는 것이 좋다.‘형이나 언니’라는 호칭의 의미가 단지 그저 ‘나이가 많다’라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한 가지의 의미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테지만 나이 이외에 그 호칭이 갖는 여러가지 다른 의미가 있을뿐만 아니라 그 의미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 쉽다.

그렇다면 이민생활 속에 한국 사람들끼리 호칭을 어떻게 부르면 될까? 우선 나이가 더 많든 적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반말을 들어서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초면에 쉽게 말을 놓는 것은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 나이가 어려도 깍듯하게 상대방을 존댓말로 존중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한국인의 문화가 ‘정’이라고 하지만, 사랑뿐만 아니라 경외도 균형있게 배어있는 관계가 건강하고 오래간다. 내 주위에는 이 어린 목사를 배려해주시고 존중해주시는 어른들이 많이 계시다. 그런 분들을 뵐 때면 절로 고개가 숙여질뿐만 아니라 나도 어른이 되었을 때 ‘저 어른처럼 되고 싶다’라는 마음의 소원을 갖게 된다.

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인 호칭은 형제와 자매이다. 하지만 한국적 특성상 어르신들을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더 나이가 먹을 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모두 내가 배워야 할 분들이다라는 마음으로 나는 “선생님”이라고 불러드린다. 나이가 얼추 비슷하거나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으면 “~씨”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것 같다.

최근 어떤 분에게 호칭을 선생님이라고 했더니, 선생님 보다는 이름에 님자를 붙여서 자신을 불러달라고 하셨던 부탁이 기억이 난다.

“혜원님”이라는 호칭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영어이름을 쓰는 것도 괜찮다. 한국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불편하다면 영어이름을 부르면 그나마 어느 정도 건강한 관계의 선이 그려진다.

선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는 형이나 언니라는 호칭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선을 지킨다는 의미는 관계의 안전거리가 확보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한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위해 호칭을 골라부르는 경우도 있다. 배려와 존중이 없는 호칭의 부름은 싸우자라는 말과 같다.

드라마에서도 보면 갑자기 화난 사람이 ‘아무개씨’라고 누군가를 불렀을 때, 그 당사자가 ‘뭐 씨?’라고 하면서 불쾌해하는 장면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호칭을 부르는 사람도, 그리고 그 호칭으로 불리우는 사람도 서로간의 배려와 존중의 옷을 입고 관계를 설정해 나아간다면 오해는 금방 풀리고 관계 속의 앙금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민생활은 외롭다. 하지만 외롭다고 해서 내 경험과 방법으로 쉽게 형이나 언니가 될 수 없고 아우도 될 수 없다. 도로에는 중앙선이 있다. 아무리 옆사람을 통해 이 외로움을 극복하고 싶어도 넘지 말아야 할 관계의 중앙선이 있는 법이다. 중앙선을 모르고 실수로 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내 길이 아닌 중앙선 반대편이 좋다고 계속 그 길을 달리다가는 대형사고가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나님이 사람을 나의 자녀라고 부르셨을 때까지, 그리고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되기까지 서로의 마음이 통하기까지 그 세월은 정말 오래 걸렸다.

그리고 서로의 진심이 통하기 까지 오해와 아픔과 상처가 있었고,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가를 마음에 새기며 건강한 관계를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는 이민사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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