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었다. 게리 토마스의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전면개정 증보판인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Thirsting for God)”이란 책이다.
저자는 기독교 고전을 통해 배운 지혜를 깊이 있고 쉽게 풀어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고 한걸음에 다 읽어 내릴 책은 아니다. 장이 넘어가면서 나 자신의 영적 초상을 더 깊이 더 세밀하게 관찰하게 했고, 나의 영적 여정을 되새기게 했다.
죄의 파멸성
특히 죄와 유혹에 약한 나를 더욱 집중하며 보았던 장이 있다. 제2장 죄와 유혹이었다. 게리 토마스는 이 장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가 어떻게 죄를 넘어 거룩함에 이를 것인가에 대해 두 영적 거장의 교훈을 통해 소개한다. 그는 먼저 질문을 던진다.
“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러나 저자는 답을 하기에 앞서 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독자들이 갖기를 바라며 몇몇 고전 작가들의 죄에 대해 묘사를 하는데, 그 말이 나의 뇌를 내려쳤다.
“죄는 택함 받은 영혼이 맞을 수 있는 가장 호된 매다. 이 매는 남녀 영혼을 마구 후려치고 난타하여 파멸로 몰아간다.”(노리지의 줄리안)
나는 지금까지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매는 혹독한 시련 혹은 고통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쥴리안의 이 말을 읽는 순간 그동안 본질을 놓치고 있었다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본질을 꿰뚫고 있는 쥴리안의 간명하고도 예리한 설파에 전율하였다.
뒤돌아보니 혹독한 시련이 나를 깊은 고통의 세계로 몰고 갔지만 그것이 나를 죽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경성하게 하였고 더욱 하나님 앞에서 살게 했다. 정작 나를 죽게 만든 것은 실은 죄였다. 매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짓는 죄였다. 그 작은 죄가 나를 서서히 죽어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가 소개하는 프랑수아 페넬롱의 말이 나의 현실을 대변해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뿐인데 우리는 그분께 자신을 내드리지 않는다. 반면에 세상은 우리를 압제하여 파멸시키려는 것뿐인데 우리는 세상에 자신을 내준다.”
죄는 나를 파멸하게 한다. 그렇기에 죄는 내가 맞을 수 있는 그 어떤 매보다 호된 매다. 이 깨달음이 확 다가올 때 사도 바울을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6).”
게리 토마스는 말한다. “죄란 느린 속도의 자살 행위이다.” 그렇다. 내 안의 죄는 내가 나를 죽이는 자살이다.
그러나 게리 토마스의 지적처럼 나는 죄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다. 서서히 나를 죽이는 매인 줄도 모르고 타협하고 죄의 욕망을 채운다. 죄에게 문을 열어주고 활개치게 한다. 이러한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고전 작가의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게 하신다.
“죄가 만일 쥐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죄를 쥐로 대해야 한다. 집 안에 쥐가 없기를 바라는 사람은 당연히 쥐가 꼬일만한 음식물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쥐가 들어올 만한 구멍을 모두 막을 것이다. 내 힘으로 안 된다면 외부의 조언이나 도움을 구할 것이다. 쥐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쥐를 퇴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쥐를 품고 사는 것 같은 나의 실상이 소름 끼치게 되살아난다.
한편 쥐구멍을 틀어막고, 들어온 쥐를 잡으려 하나 늘 실패했던 나의 초라함이 도드라진다. 사도 바울의 고뇌가 실감이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이 몸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도의 거룩에 이를 수 있을까?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가짜 거룩이라는 위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거룩의 길
게리 토마스는 이러한 고뇌에 거하는 우리 모두에게 아빌라 테레사의 말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영적 기쁨을 이미 맛보았기에 세상의 낙이 오물처럼 느껴진다. 영혼은 후자를 점차 멀리하면서 더욱 자신을 다스리게 된다. 요컨대 덕이 자라간다.”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우리의 욕구가 달라지면 거기서 거룩함이 싹튼다는 것이다. 즉 참된 거룩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거룩의 구심점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해지면 죄에 대한 욕망이 꺾이고 시들해진다. 다만 이것은 하룻밤 사이에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낡은 죄의 습성은 언제라도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창조주를 사모하고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알면 거룩함은 그 열정의 부산물로 따라 나온다. 우리가 죄를 그치는 것은 그냥 훈련 때문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니 새로운 거룩으로 충만했던 때가 떠오른다. 그런 때는 예외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새 은혜를 덧입었을 때다. 설령 넘어졌다 할지라도 이 하나님을 목마른 사슴같이 찾아 겸손히 나를 내려놓고 주의 은혜를 구했을 나는 더욱 순결한 영혼이 되어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하나님이 가깝게 여겨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내 마음에 모시는 거룩이 타올랐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고뇌에서 벗어나 외친 그 말씀이 나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게리 토마스는 프랑수아 페넬롱의 말을 들어 겸손을 강조한다.
“주여, 주님은 주님께 가장 헌신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게 허용하십니다. 선한 영혼들 안에 남아 있는 이런 부족한 모습이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게 하며, 더 간절히 주님께로 달려가게 합니다.”
겸손히 주님께로 달려가는 것이 죄를 지은 후의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 영혼에 뚫린 죄란 쥐구멍을 막는 것이요, 내 안에 가만히 들어온 쥐를 쫓아다니라 애쓰지 않고 몰아내는 법이다.
새벽을 깨우며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때마다 희망이 솟는다. 조금씩 매일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는 거룩의 옷이 입혀진다. 죄가 스러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이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