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선교하는 그리스도인

뉴질랜드에서 다민족교회를 섬기는 동안 많은 일들과 많은 사람들이 내 삶의 문을 두드리며 스치고 지나갔다. 그 중에서도 뉴질랜드에서 다시 사역하는데 가장 고마운 동역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에서 3년간의 박사공부를 마칠 무렵 그곳에 사역지가 주어졌지만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서 급하게 한국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나를 위해 주야로 기도해 주시고 계신다 .

하지만 미국에서 갑작스레 뉴질랜드로 돌아와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사역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교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뉴질랜드에 있다 보니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어서인지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미국에 가서 사역하고자 했던 계획을 일단 접기로 하였다.

힘들었지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위해 기도를 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사실 외국에 나가서 선교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교사가 되기위해 모든 선교단체와 외국에 있는 사역지에 연락을 하였지만 쉽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또한 현지 키위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문들도 쉽게 열어주지 않으셨다. 정말 너무나도 슬픈 현실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꼭 절망의 늪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신학교에서의 교수사역을 알아보았는데 다행히 오클랜드에 있는 몇몇 신학교에서 강의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교수사역을 하면서 선교에 대한 꿈을 다시 키우기로 다짐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인교회에서 잠깐 동안 청년사역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서 몇 달 동안 청년사역을 도와주며 선교지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그저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 하나만을 가지고 오클랜드에서 이민자들을 위한 인터내셔날 교회를 시작하고 싶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꾸만 가슴속 깊이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다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자꾸만 선교의 사명을 주시기 시작했다.

기도의 응답인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신학교 교수가 키위교회 하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주님께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선교의 문을 조금씩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신학교 교수를 통해 알게 된 말레이시아의 몇몇 현지교회에서 초청받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는 단기선교의 기회도 나에게 주어졌다.

말레이시아에서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앞으로 말레이시아로 선교지를 정하고 싶을 정도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젊어서였는지 몰라도 정말 자신감도 넘쳤고 용감했던 것 같다.

7년전 그때 신학교 교수가 소개해 준 작은 키위교회를 섬기면서 오후 4시에 우리가족끼리 이민자들을 위한 인터내셔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시작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동역자 없이 예배를 지속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내가 포기하지 않을 만큼 사람들을 보내주셨다. 우리의 사역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였지만 꾸준히 몇몇의 사람들을 보내주며 개척교회의 경험을 하게 하셨다.

그 경험들은 참으로 소중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결코 실패했던 사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교에 대해 포기하지 않은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의 불씨를 보존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선교에 대한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올라 지금의 나를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더이상 너무 견디기가 어려워서 우리 가족들은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 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으니 이번 예배가 마지막이 되게 해주세요. 더이상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요. 제가 너무 마음만 앞섰던 것 같아요.”

그때였다. 기도를 마치자 갑자기 교회 문이 열렸다. 한 자매가 몇몇의 학생들을 이끌고 교회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성경공부를 하고 싶어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우리 교회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자매는 원래 시티에 있는 큰 현지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성경공부가 하고 싶어 말씀으로 양육을 받을 수 있는 가족같은 교회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 자매는 그때부터 우리와 인연이 되어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7년간 묵묵히 우리가족과 동거동락하며 하나님나라를 섬기고 있다.

지금은 집사로 내가 사역하고 있는 Greyfriars장로교회에서 코리안그룹 리더로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 늘 묵묵히 열심히 아무 불평없이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며 섬겨주는 아주 고마운 분이다. 이제는 가족보다도 서로를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주안에서 서로의 힘들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질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내가 풀타임 사역자로 90% 이상이 유럽피안으로 구성된 Greyfriars장로교회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도 함께 해주었다. 사실 그 집사는 약4년전부터 한국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뉴질랜드로 모셔와서 함께 살고 있다. 영어를 전혀 못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권사님은 우리교회 키위들과 너무나도 의사소통을 잘하고 있고 친구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를 못하는 분들을 위한 영어공부나 예배를 드릴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들의 신실한 노력과 희생으로 키위들은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인해 작년부터 우리 교회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성경공부과정도 생겨났고 얼마 전부터는 격주로 금요일 저녁 한국어 예배도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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