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라이프

목마름

아침에 해변가에 나가면 개들과 함께 산책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바닷가에서 주인과 애완견들이 함께 즐기는 놀이 중 하나는 주인이 공을 던지면 애완견들이 물어오는 놀이다.

그런데 애완견 주인들 가운데 여러 명이 그 공을 바다에 던져서, 애완견들을 바다로 뛰어들게 한다. 이미 바닷물이 익숙한 애완견들은 금방 물속으로 뛰어들어 공을 물어오지만, 그 놀이를 처음 하는 개들과 그 놀이를 하기에 이미 나이가 든 개들은 바로 물에 뛰어들지 않는다.

개들은 본능적으로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털을 적신 물이 피부에 닿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목욕을 즐기는 개들은 없다. 애완견을 키우는 주인들이 바닷물에 개들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애완견들이 물에 익숙해져, 집에서 샤워할 때 덜 저항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물을 두려워하는 개들과 나이가 든 개들은 바다위로 던져진 공을 보고 주인의 발 밑에서 주인의 눈을 올려다 본다. 그렇게 두세 차례 눈길을 교환하고, 주인이 바닷가로 뛰어들어! 라는 눈짓을 하면 그제서야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진다.

개들의 입장에서 바다에 뛰어들기 싫지만,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주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돌보아주고 먹여주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준 주인이 바닷물을 바라보며 들어가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개들은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물로 뛰어든다. 본능을 거스른 대가로 주인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목마르십니까?
예수님께 가까이 나갈 때, 예수님의 모습과 함께 나의 죄 된 본성도 드러난다. 주님을 따라 가기 원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강하게 막는 나의‘옛 자아’를 만난다.

문제는 이런 옛 성품이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귀중품을 꼭꼭 숨겨놓은 것처럼 내 안의 깊은 곳에 숨어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와 관계와 상황을 악화시킨다.

평상시에 나의 옛 성품을 관리하거나 지켜보지 않았다면, 이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나의 옛 성품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오랜 세월 동안 신앙 생활을 한 내공이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의 본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앙생활의 미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감추고 살아간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는 것은 미성숙한 크리스천이라고 정의한 결과이다. 다행히 사람들 앞에서 나의 본성을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옛 본성은 마그마를 품고 분출할 곳을 찾는다. 그 대상이 가족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믿는 불행한 가정이 양산된다.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나의 죄 된 본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말씀 앞에서 드러난 나의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주님을 따라 갈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 헌신하면, 그 헌신의 깊이만큼 내 영혼은 더욱 곤고해진다.

옛 본성을 품고 주님을 따라가는 이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는 나를 주님은 이렇게 초청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요한복음7:37). ”

나의 힘으론 나의 옛 성품을 버릴 수 없다는 탄식이 나의 타는 목마름이었다. 나의 죄를 성경 말씀 안에서 보기 시작했다.

모든 문제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된 본성 때문이었다. 설교를 위해서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적 생명을 살리는 묵상이 필요했다.

주님을 향한 비루한 자의 목마름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았다. 말씀이 죄 된 본성을 비추어, 내 죄가 무엇인지 말씀 앞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수의 강
애완견이 주인과 함께 살려면 주인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개들이 물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가만히 있는 것을 어려워한다.

개들에게 가장 힘든 명령은 ‘stop’이다. 움직이고 싶은 그 본성을 통제할 수 있어야 자신을 돌봐주는 주인과 함께 살수 있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 애완견들은, 길들여지는 것을 배우는 학교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애완견들은 배고픔과 체벌을 통해 내가 사람을 말을 들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길들여진 애완견만이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나는 그 누구에게도 통제되지 않는 괴상한 크리스천이 된다. 하나님이 말씀해도 듣지 못하고, 말씀 앞에서도 반응하지 않는 바리새인이 된다. 그리곤 순종을 배우는 광야 학교로 보내진다.

말씀이 나의 옛 성품을 비추자, 그 동안 무엇 때문에 목말라 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목마름은 세상의 성공과 유명해 져야 한다는 열등감에 닿아 있었다.

땅에 속한 목마름은 나의 모든 삶을 뒤엉켜 놓았다. 세상의 것에 목말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거짓된 경건과 매너리즘은 내 영혼을 좀 먹고 있었다.

상처 받은 내 영혼이 보였다. 발에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계속 전진하는 부르튼 발이 보였다. 주님은 그런 나를 생수의 강으로 이끌었다. 그 생수의 강은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에서부터 흐르고 있었고, 요한의 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에 닿아 있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나의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새 사람 (New creature)으로 산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의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도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난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옛 자아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예수님은 생수의 강에 옛 자아를 잠기게 하라고 말씀한다.

바닷가에서 공을 주워 오는 많은 애완견들이 보인다. 여전히 차가운 바닷물인데 열심히 물로 뛰어드는 애완견 한 마리가 이렇게 짓는 것 같다.

“너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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