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와의 인연

지난 1956년 12월, 해군에 지원 입대하여 1962년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하여 무직자로 1년, 지방공무원으로 2년, 그리고 해군에서 군함 승선경력 3년이 인정되어 대한 해운 공사의 보통 선원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하여 1965년도에 외항선 선원으로 취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와는 생이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10년의 세월을 선원으로 보냈으나 아내와 함께 푸른 꿈을 이루는 단란한 가정은 마련되지 않았다.

갑판견습원으로 시작한 선원 생활 3년 만에 해 기사 자격시험에 합격(을종 일등 항해사 고시에 합격)하여 3등 외항선 항해사가 되었다.

그 후 5년 만에 일등 항해사가 되었다. 그동안 인생의 많은 풍파가 있었으며 선원 생활에서 뼈저리게 겪는 외로움과 싸우며 폭풍의 위험을 수없이 겪었다.

그리고 한탕주의(밀수)와 이성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 하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함께 입사한 친구가 외국 땅에서 실종되어 다시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슬픈 이야기도 있었다.

나 또한 항해 중 작업을 하다가 크게 다쳐 일본에 긴급입항을 하여 응급치료를 받고 한국의 설날 아침에 양팔을 싸매고 집에 도착하여 아내가 눈물바다를 이룬 일도 있었다.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마도로스의 삶은 항구마다 술잔을 기울이는 부평초 신세가 되어 육지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살게 되었다. 육지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요원하기만 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선원 생활 10년이란, 육지 생활 10년의 후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선원이 그토록 갈망하며 험난했든 바다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뭍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구멍가게를 시작하기 위한 작은 자본을 사기를 당하거나, 아니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몇 달 혹은 몇 년을 실업자로 찌들어지기가 일수였다.

삼십 대 후반에 들어선 나 자신을 발견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 끝에 낯선 나라로 이민을 하여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졌다.

이민을 처음 생각해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지도책을 보다가 한국의 정 반대쪽에 있는 넓은 브라질이 부러워 이런 나라에 가서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뉴질랜드 땅에 처음 발을 밟게 된 것은 1965년 12월경이었다. 대한 해운 공사 소속 화물선(외항선)인 “마산 호”에 승선하고 있을 때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건축자재인 철재를 적재하고 오클랜드에 입항했다.

오클랜드에는 9일간 정박하여 하역했으며 선원들의 대부분은 매일 일과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는 선원회관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그 당시 오클랜드에는 교회에서 경영하는 풀라잉 엔젤스와 몇 교회가 연합하여 경영하는 씨페어레스 센터(Seafarers Centre), 그리고 천주교에서 경영하는 Stena Maria, 이렇게 세 곳의 선원회관이 있었다.

본선이 프레이버그 부두(Freyberg Wharf)에 접안을 하자 Seafarers Centre에서 일주일간의 일정을 본선의 식당에 붙여 주었다.

선원들에게 인기가 좋은 날은 목요일(영화감상)과 금요일(댄스파티)이었다. 그때 관람한 영화가 “십계” 였으며 한국에서는 그로부터 10년 후에 일류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댄스파티에는 선원회관에 연관된 교회의 부녀봉사회에서 정해진 차례로 따라 선원들을 위해 파트너가 되어줄 여자 교인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왔다.

가족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외로움과 바다의 위험 속에 생활하는 선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잠시나마 춤을 추는 파트너가 되어주는 그 아름다운 마음이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댄스파티는 1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끝난 다음에도 교회의 자원봉사자들은 얼마 동안 선원들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안전 항해를 빕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오랫동안 사귀었든 친구들처럼 손을 흔들며 모두 떠나갔다.

처음 만나는 외국 선원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 자원봉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뉴질랜드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단면을 보는 듯했다.

선원들을 위해서 교회에서 이렇게 봉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선원이란 직업은 외롭고(가족과 친구들과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야 함), 항상 위험이 뒤따르며(폭풍과 파도, 화물적재, 어로작업),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술, 이성, 도박) 직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나그네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 당시 오클랜드의 저녁 6시 이후의 밤거리는 적막하기만 했다. 슈퍼마켓은 오후 5시에 문을 닫았으며 술집(Tarven) 은 오후 6시에 문을 닫았다.

오클랜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퀸 스트리트도 저녁 7시 이후에는 보행자는 물론 자동차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한국의 6.25동란 때 피난 간 도시처럼 생각되었다.

오클랜드에서 맞이하는 첫 일요일 아침은 맑은 날씨였으며 다른 두 선원과 함께 부두에서 약30분 거리에 있는 Albert 공원을 찾아갔다.

그때 마침 5-6세쯤 된 아이들 십여 명과 인솔자로 보이는 40대의 백인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인근에 있는 교회의 주일학교 아이들과 교사였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인형과 같은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난 다음 주일학교 교사의 안내로 교회에 가서 샌드위치로 점심 대접받았다.

그리고 저녁 7시 예배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본선인 마산 호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낮에 함께 공원에 갔었던 다른 두 선원은 이미 외출을 하고 없어 나 혼자만이라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저녁 7시 예배에 늦지 않도록 그 교회에 도착했다.

예배가 끝난 다음 낮에 만났던 주일학교 교사가 뉴질랜드 방송국에 근무하는 젊은 남자를 소개해 주면서 젊은이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부인은 재치가 있어 나의 서툰 영어도 잘 알아들어 모처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3일 후에 저녁 초대를 받아 뉴질랜드의 가정에서 양고기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직업의 특성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삶이 너무나 부러웠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 없이 헤어진 그들 부부였지만 이날 맺어진 인연으로 훗날 뉴질랜드의 취업이민으로 오게 될 계기가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산 호의 두 번째 항구는 웰링턴이었으며 7일간의 정박기간 동안 비바람이 몰아쳐 좋은 날씨는 3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웰링턴 항에도 부두에 선원회관이 있었으며 외항선원들의 편의를 위해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