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사랑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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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고는 하는데 1년에 단 몇 차례만 교회에 출석하는 크리스천을 우스갯말로, Christmas, Easter Only를 줄여, CEO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답니다.

버스를 운전하면서 만나는 많은 뉴질랜드인들이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얘기를 더 나눠보면 우리가 아는 열정적인 크리스천이라기 보다는 명목상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탄절, 부활절 즈음이 되면 사람들은 쇼핑이나 휴가일정에 더 관심이 있을 뿐 더 이상 그리스도의 나심이나 부활하심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때가 되면 더욱 성탄과 부활의 진짜 의미를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언젠가 어느 학생이 자기 홈스테이 가족에게 교회로의 초청을 했더니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우리는 이제 교회 가서 기도할 것이 없어.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하거든. 나는 내 삶에 만족한단다.”

마귀의 최근 전략이 바뀌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과거에는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어렵게 만들어 신앙을 버리게 만들려 했는데 오히려 그 믿음이 더 굳세어지자 이제는 그 전략을 바꿔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도록, 더 바빠지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 방법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점점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고 육신의 달콤함을 좇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문명의 발달로 인간은 더 바쁜 삶을 살게 되었고, 쉴새 없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더 발전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삶을 가혹하게 몰아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을 찾을 잠시의 시간조차도 아깝게 느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편하자고 만든 문명의 이기들은 더욱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고 더 자극적인 것들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다 알고 있는 것들, 혹은 당연한 것들’만 가르치는 교회는 문명적 현대인들에게 그저 소모적인 시간낭비로만 여겨지게 된 것이지요.

마귀의 신 전략(?)탓에 기준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것, 자극적인 즐거움’은 더 이상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해야만 그들을 살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더욱 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기본, 교회의 뿌리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구요. 무척이나 고리타분한 표현이지만 교회가 세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사랑’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 기본이 되어야 하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교회에 그 헌신적인‘사랑’이 없는데 세상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한 동료기사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집트인인 크리스천이었는데 워낙 다혈질이어서 운전을 하는 동안 그렇게 욕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왜 그러느냐, 저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 아니냐, 나도 내 자식이 남에게 욕먹으면 그 사람이 미워지던데 저들을 욕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깝지 않으시겠느냐 일장 설교를… 아, 직업병인가요?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세상을 보면 감히 미워하고 욕하고 깎아 내릴 용기가 서질 않습니다.

나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임이 분명한데 내가 남 욕이나 하면서 제 잘난 맛에 사는 질 낮은 삶을 산다면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 역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비록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래봬도 나 때문에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또 나 때문에 죽으셨으며 또 나 때문에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그만큼 값진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남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어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한다 말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내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내가 뭔데 내 능력으로 사랑을 베풉니까? 베푼다 한들 그 사랑은 며칠, 아니 몇 시간 가지 못할 겁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은 내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버스 운전을 하다 보니 겉모습만 봐도, 서 있는 모습만 봐도 그 사람이 요금을 내는 태도만 봐도 대충 그 사람의 인간됨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을 버스에 태우거나 대면하며 웃으며 인사하기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다지 친절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그들을 웃으며 맞이합니다. 되도록이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의 한 예가 되기를 위해 노력합니다.

마태복음 14장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진 것이 겨우 오병이어 뿐이라 ‘이걸로 뭐가 되겠습니까?’라는 뜻으로 ‘이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지요.

그 때 예수께서 축사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다시 명하시어 나눠주시기 시작하자 무리가 다 먹고 열 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제자들이 능력을 발휘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리들에게 오병이어를 나눠준 것은 분명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능력으로 준 것이었지요.

사랑의 능력도 이와 같습니다. 사랑으로 누군가를 대하는 것은 분명 내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 능력으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의 능력으로 주는 것입니다. 순종하여 먹을 것을 나눠 준 이들은 그 능력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나눠주고 나눠주어도 충분히 남습니다. 열 두 바구니나 더 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받아 누리는 삶에만 익숙하던가요? 사랑을 받으려고는 해도, 베풀기에는 많이 인색합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받아 내고자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니 받을 것을 찾다가 찾다가 결국 받아 내게 되는 것이 상처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으려 하지 말고 우리 아버지에게 구해서 받으면 어떨까요? 아버지에게 받아서 지체들에게 나눠주면 어떨까요?

사랑은 먼저 베푸는 이가 받는 이보다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솔직히 사랑 안 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게 더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런데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우리 사이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의 방해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가장 빠른 길은 자연스럽게 지체를 사랑하며 섬기는 일입니다.

내가 그들을 평가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함께 예배 드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들풀처럼 일어나서 사랑의 이름으로 참된 부활절, 성탄절을 보낼 수 있는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사랑의 사도가 되기 위해 운전대를 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