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주의의 대두

1, 2차 유대전쟁이 끝난 뒤, 유대인들은 이후로 팔레스티나(팔레스타인)로 불리고, 유대인들은 계속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그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온 세계로 흩어졌으나 여전히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살았다. 유대인들은 랍비를 중심으로 종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는데, 어느 나라에서든 주류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였다. 사실 동화되기를 거부했다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헤어질 때는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고 외쳤다. 결혼식을 하면 집안 한 구석에 컵을 깨어놓아서 파괴된 성전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꿈꾸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땅에 처음 들어가 살게 된 것은 BC1400년경부터이다. 그러나 그 후 300여년은 그 땅의 원주민들과 공존하는 상태였고, 실제적으로 그 땅을 독점적으로 차지하게 된 것은 다윗 왕 때인 BC1000년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분열된 왕국인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BC722년)에 의해,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BC586년)에 의해 각각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여 주실 것을 늘 꿈꾸었고, 마카베오 혁명으로 100여년(BC165~BC63) 독립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두 차례 유대전쟁에서의 패배함에 따라 그 땅에서는 살지도 못하게 되었다.

사실 역사적 사실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의 거주자로 살게 된 것은 여호수아로부터 2차유대전쟁까지 약 1500년간이고 그 중 독립된 국가로는 약 500년간 그 땅에 존재했다.

그런 이스라엘이 무려 18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1948년 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일까? 사람이 이룬 일일까?

드레퓌스 사건
19세기 말 프랑스는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보불전쟁, 1870~1871)에서 패배했다. 패전 이후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반 독일 감정이 꼭지에 도달해 있을 때인 1894년, 나라의 정보를 독일에 유출하는 한 문서가 발견되었고, 독일계 유대인인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그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드레퓌스는 자기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는 변호인도 허용되지 않은 군사재판에서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종신형에 처해지고 군적 박탈을 당하여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 섬으로 유배당하였다.

2년 후 그 간첩 행위의 진범 에스테라지가 잡혔는데, 군 당국에서는 오히려 진범을 잡은 조르쥬 피카르를 군사기밀누설죄로 체포하고 진범 에스테라지는 무죄로 석방한다.

이 사건이 한 신문에 공개되었고, 유명한 작가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낸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을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기고하면서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 파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며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 드레퓌스 파로 완전히 양분된다.

드레퓌스의 무죄 증거가 나오고 진범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에 편승한 대부분 언론들이 “드레퓌스는 죽어라”하는 폭언과 함께 드레퓌스를 공격하고 재심을 반대하였다.

여기에 가장 앞장 선 것이 <라 크루와>(La Croix, 십자가라는 뜻)와 <르 펠렝>등 카톨릭 계통의 주요 일간지들이었다.

이 사건이 났을 때 참모본부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회 파 교단과 관련이 있었고, 예수회 파는 적극적으로 반드레퓌스 파에 가담하였다. 그들은“유대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반역을 도모하는 스파이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예수회의 기관지 <씨빌타 카톨리카(Civilta Cattolica)>)라고 하면서 그들은 유럽의 각 나라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나중에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카톨릭 교회와 군부가 안보를 구실로 공권력을 얼마나 농단했는지, 국가주의가 어떻게 진실을 가리고 개인의 인권을 짓밟았는지가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정교분리 법이 제정되었고, 드레퓌스는 재심으로 무죄가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테오도르 헤르츨 이라는 오스트리아 유대인 저널리스트가 중심이 된 시온주의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 시온주의(Zionism)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로 표현된다. 1791년 제헌의회는 알사스-로렌 지역에 사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게토에 갇혀 살던 유대인들에게도 해방과 자유를 주며 반유대주의를 청산하는 시대정신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민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치와 종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 랍비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유대인들은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는 것보다 유대교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였다. 이 일은 오히려 반유대주의를 강화하는 결과가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나라 테오드로 헤르츨은 시온주의를 반대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류 사회에 잘 적응하여 살았다.

그러나 대혁명의 기운이 넘치는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에서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진실이 묻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되는 드레퓌스를 보면서 헤르츨은 유대인의 나라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게 되고 시온주의를 적극적으로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이며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시온주의는 헤르츨이 시온주의를 찬성하기 이전부터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의 한 흐름으로 발흥하였다.

시온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헤르츨은 1896년 2월, “유대인 국가”라는 책을 펴내고 시온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그 해 8월에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왕)을 찾아가 그 땅을 유대인 국가에게 내어달라고 요청한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온주의자 세계대회에서는 그의 노력의 결실로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헤르츨은 적어도 50년 안에 유대인 국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며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세우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알리야)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1904년에 병사하였지만 그의 시오니즘 유대국가 건설운동은 계속 이어졌고, 그는 현대 시오니즘의 창시자로 불린다.

헤르츨을 이은 시오니스트들의 활약으로 이스라엘 국가 건설은 유럽 국가들의 관심과 지원을 얻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중 독일과의 전쟁에서 유대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영국의 외상 벨포어는 1917년 11월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선언(벨포어 선언)을 한다.

사실은 그 이전 1915년에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협조를 얻기 위하여 영국의 이집트 주재 외교관 맥마흔이 아랍 민족운동 지도자 후세인에게 보낸 여러 차례의 서신(맥마흔 서신)에서 그 땅에 독립된 아랍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서로 충돌되는 두 가지 약속, 이것이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보인 영국의 이중적 정책이었으며, 오늘날까지 모든 갈등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