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셋째 주 찬송/4월 넷째 주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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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셋째 주 찬송/242장(통233장)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곡명 WALKING IN THE KING’S HIGHWAY는 해리스(Magaret J. Harris)가 1906년에 지은 찬송입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178장)’, ‘정결하게 하는 샘이’(198장)와 함께 우리 찬송가에 세 곡이 실려 있는데, 작곡자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일본 선교사인 미국감리교 해리스 목사(Meriam Colbert Harris, 1846-1921)의 세 딸 중 한 분일 것이라는 것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해리스 목사는 내촌감삼(內村鑑三)을 비롯한 일본의 사상적, 정신적 위인들을 길러 낸 인물입니다. 그는 사뽀로에 농업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에게 땅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킨 분인데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많은 찬송을 지어 부르곤 했다고 하니 이 찬송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네요.

나는 이 찬송을 부를 적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는 이사야서 35장 1절과 2절 상반 절을 노래한 것이며, 진리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자를 나타낸 “구속함을 노래 부르며”는 9절 “오직 구원 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처음 시작부분에 ‘솔솔도도도시로레미’에서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작은 음표로 표시된 반주의 ‘솔도미’는 꽃잎이 봉우리를 벌려 활짝 열리는 것 같지요?

그 아랫단의 작은 음표는 “랄랄라”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요. “샘물 터지고”에선 “퐁퐁퐁” 을, 마지막 절 “면류관 쓰고”에선 껑충껑충 상을 받으러 시상대에 오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적 구원과 영적 구원의 감사노래인 “하나님의 아름다움과”에서는 35장 2절 하반절을, “모든 괴롬 잊어버리고”에선 2절 상반절과 10절 하반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를 운율 시로 노래한 것입니다.

“마른 땅에 샘물 터지고”의 3절은 6절과 7절을 노래한 것이고, “거기 악한 짐승 없으니”는 9절 상반 절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를 노래한 것입니다.

‘샘물’이나 ‘물’이란 단어가 반복 되는데, 같거나 비슷한 어구를 겹쳐서 쓰고 있는데, 점층법(漸層法)이라고 하지요?

우리 찬송가사에는 빠져 있지만 “그 때에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이사야 35;6)”라는 말씀도 함께 생각하며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진리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자만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생명의 길에 들어설 것을 말하는 8절 말씀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찬송에는 “거룩한 길”이란 말이 열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요, 원 영어 찬송에는 ‘메기고 받는’ 응창(應唱, responsorium)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선창자(先唱者)가 “황무지가 장미꽃같이”하고 메기면, 모든 이들이 “거룩한 길 다니리”로 받아 응창합니다.

“거기 대로(大路)가 있어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란 8절 말씀으로 원 작사자는 ‘왕의 대로’라고 표현 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이 원래 ‘왕의 대로를 걸으며(Walking in the King’s Highway)’이거든요.

‘왕의 대로’란 다메섹에서 지중해의 아카바 만까지 남북으로 뚫린 중요한 고대의 통상로입니다. 작사자는 고대로부터 남북을 가로지르는 이 대로를 하늘나라로 이르는 당당한 길로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에서 셋째마디의 “피는 것을 볼 때에”와 일곱째 마디, 마지막의 “거룩한 길 다니리”에서 한 박자 미리 나와 다르게 부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미 꽃 같이”, “노래 부르리”, “맑고 밝은”의 끝 음인 ‘이’, ‘리’, ‘은’의 음의 길이를 충분히 길게 하면서 여유 있게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후렴에서 “검은 구름”에서도 대부분의 회중들이 ‘검’을 한 박자 반으로 틀리게 부르고 있는데, 약박자인 ‘검’은 짧고 약하게 ‘거’라고 발음하고, ‘은’은 악센트를 넣어 리듬감 있게 ‘믄구름’이라 붙여 부르면 경쾌한 맛이 살아나게 되지요.

4월 넷째 주 찬송/94장(통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장로교 소요리문답집의 제일 첫 질문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입니다. 그 문제의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이 말의 뜻을 전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즐겁게 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요? 나는 즐겁지 않아도 하나님만 즐겁게 하면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 뜻을 곰곰이 살펴보면, 하나님만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즐겁고, 나도 함께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때문에… 바로 하나님 자체가 나의 자랑이고 나의 기쁨이며 나의 인생관이기에… 내가 주님을 좋아하여 그 뜻대로 사는 그 삶 자체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란 말이죠.

나의 기쁨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아하는 나의 즐거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씀 아니겠어요?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Enjoy God)”, 하나님을 나의 가장 귀한 가치로 삼고 사는 인생관, 가치관을 노래하는 것이 모든 찬송의 내용이며 고백입니다.

세상의 부귀, 명예, 행복,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라고 고백한 이 찬송은 미국 나사렛 감리교회 목사 부인인 밀러 여사(Mrs. Rhea F.Miller)가 1925년 작시한 것을 50년간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의 독창자로 봉사한 쉐아(George Beverly Shea,1909-2013)가 1929년에 작곡하였습니다.

이 찬송은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 때마다 쉐아의 굵은 베이스 목소리로 불려지고 갈채를 받아왔는데 그 때마다 그는 “이 갈채도 주 예수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간증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80년대 초, 여의도에서 처음 열렸던 빌리 그레함 전도대회에 연합성가대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들었던 팔십 고령인 베이스 가수 쉐아의 목소리의 여운이 지금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하는데요, 어느 날 이 찬송을 부르다가 특별한 것을 발견하고서 보물을 찾은 듯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의 ‘것’음(音)이 모든 음보다 특히 높이, 옥타브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때 요한복음 3장 16절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 바로 앞 14절에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기술되어 있듯이, 그 옛날 광야 생활 때에 불 뱀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모세의 손에 높이 들린 구리 뱀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구리 뱀의 자리인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강대 위에 높이 달린 십자가, 교회 첨탑위에 높이 솟은 십자가. 그 십자가를 우리 삶에 최고의 가치로 삼고 바라보고 믿는 이마다 구원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세상의 부귀로 얻는 기쁨보다 기쁘고, 어떤 세상의 명예보다도 명예로우며, 그 어떤 세상의 행복함보다 행복합니다.

음표에 은혜로운 부분이 또 있습니다. 후렴에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에서도, 마지막 종지 “없네”에서의 ‘네’음이 아멘과 같은 화음을 쓰고 있는데요, 이것은 바로 ‘아멘 종지(終止, Amen Cadence)’라고 합니다.

최고의 예수를 모신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죠. “이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아멘” 하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