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억 원짜리 책

장지헌 목사<은총교회>

약 10년쯤 전에 중국 출장을 다녀 온 집사님 한 분이 아주 흥분해서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이것 보세요. 중국에서 출판된 성경이에요.”

그분의 손에는 성경책이 한 권 들려 있었는데, 출판사 정보를 보니 중국 길림성에서 정식 출판된 성경이었다. 당시 중국에 비밀리에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서 전하는 것이 중국 선교사님들의 사역 중 아주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있던 집사님이 그렇게 흥분하는 것도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우리 기독교는 성경에서 시작하고 성경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찍이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에 교육하기에 유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고 말씀한 바가 있다(디모데후서 3:1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중세 교회에서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베드로후서 1:20)”를 근거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직 사제들만 하는 일이지 일반 성도들이 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에 간다 할지라도 사제들은 평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로 설교를 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전해 들을 수도 없었기에 성경에 무지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던 분 중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는 신앙생활에서 성경이 유일한 기준임을 천명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거의 200년 전에 이미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개혁 활동에 주력하였다.

성경을 번역한 것이 무슨 큰 일이냐고 할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성경의 오용이나 신앙의 훼손을 야기시킨다 하여 화형에 해당하는 중벌로 다스렸다.

실제로 위클리프는 그가 죽은 지 40년 후에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 그의 무덤은 파헤쳐졌고, 그의 유골은 태워져 그 재는 인근의 스위프트 강물에 뿌려졌다.

그러나 성경 번역에 대한 그의 열망은 현대에까지 이어져서 1934년 그의 이름을 딴 위클리프선교회가 설립되어서 지금까지 세계의 모든 부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을 해 오고 있다.

위클리프가 가졌던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을 전하기 위한 열망은 마틴 루터에게까지 이어졌다.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그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그가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한 바르트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의 성에 숨어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은둔해 있는 그 기간에 루터가 행한 일은 라틴어로 되어있는 신약성경을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의 번역 성경은 마침 개발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대량 인쇄되어 전 유럽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그의 번역 작업은 그동안 성경을 접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 한국 역사를 볼 때 최초로 순교한 선교사로 우리는 토마스 선교사(1840-1866)를 기억한다.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를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하다가 대동강에서 순교한 분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토마스 선교사는 이 때가 처음 조선에 입국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 해 전에 그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준 김자평과 함께 백령도를 거쳐 황해도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이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토마스가 할 수 있었던 전도는 가는 곳곳마다 성경을 나눠주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가는 곳곳마다 성경을 나눠주었으며 대동강에서 죽임을 당하면서 마지막까지 행했던 것은 성경책을 전하는 것이었다.

토마스가 뿌린 성경을 가져온 사람 가운데 당시 11세 최치량은 평양 최초의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훗날 그의 집은 교회가 되었다. 당시 성경 한 권을 가지고 온 20세 여인 이신행은 여자로서는 평양 최초의 교인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이덕환도 오랫동안 평양 장대현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기독교의 역사를 다 아우를 수는 없었지만 종교개혁자나 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고 믿고 있었던 동일한 사상은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경에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전하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역사를 우리는 본다.

그 피로 이어진 성경이 오늘날에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손에 들어올 수 있다. 몇 만원만 주면 전 세계에서 가장 양질로 제본되어 있는 성경을 구입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 성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꽤 오래 전에, 예수님 시대에 성경 66권을 다 갖기 위해서는 얼마의 금액이 필요한가를 계산해본 적이 있다. 여기에서 무슨 신학적인 엄격함을 요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치밀한 과학적인 계산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서기관들의 하루 일당이 얼마이며, 하루에 몇 장 정도를 기록할 수 있으며, 당시 성경의 재료 등이 얼마일까를 고려해서 재미 삼아 해본 것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계산을 해 보았더니 무려 요즘 돈으로 23억원이나 되는 돈이 필요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23억원의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대하겠는가? 지금 대하는 것처럼 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을 단지 그처럼 돈으로 환산하는 가치로만 평가하겠는가? 성경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지침이 된다. 그 성경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신앙의 선배들과 개혁자들은 성경을 전하기에 목숨을 다하는 노력을 했고, 그들의 피의 수고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경을 가지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성경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교회의 예배 시에 파워포인트가 제공됨으로 성경책을 아예 갖지 않는 분도 생기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가 “성경은 이런 책이구나.” 라고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오늘부터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그 성경을 펴서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