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두 개혁자 , 에라스무스와 메노 시몬즈

<사진>벨기에 부르쉘 중앙 광장

네덜란드는 개혁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늦게 종교개혁이 일어난 나라이나, 에라스무스 등의 영적 각성 운동으로 인해 매우 개혁적 전통을 지니게 되었다. 그 당시 네덜란드엔 루터란주의, 재세례파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는 중산계층으로 전파되었고, 로마 가톨릭은 귀족계층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결국 계층 간에 갈등을 빚게 했는데 스페인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더 심각해져 갔다.

에라스무스, 종교개혁에 영향 준 인문주의자
그는 어떤 독단에 집착하거나 그것을 절대시하지 않았다. 그는 사상적으로 편협한 교조주의가 아니었으나 그가 살았던 시기는 신구교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시기였고, 중립지대는 없었기에, 이런 현실에서 그의 관용적인 태도는 불관용적 독단 앞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이 보다 보편적이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는 15세기 말 로틀템에서 태어나 로마 가톨릭의 울타리 안에서 살았으나 그의 정신은 꼭 그 한계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은 그를 코스모폴리탄적 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로마의 고전 작가들의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성경이나 교부문서에 의존했듯이 인문주의자들은 이교적인 고전에 의존했다.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이 신앙과 삶의 표준이었듯이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헬라와 로마의 고전들은 인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이상으로 간주되었다.

그가 교회의 방종과 폐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책‘우신예찬’은 그에게 명성을 얻게 해줬다. 그는 교회의 부패에 대해 장난스럽게 풍자했으나, 후에 루터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부패는 부수적인 것이 아닌 로마 가톨릭 교회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본질적인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인문주의 운동은 종교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고전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역사학과 언어학 연구를 촉진하였고, 고전어 연구는 성경연구를 촉진하여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오던 소위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당시 교회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종교적 폐습을 비판했으나 근본적으로 종교 운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교회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교회 개혁은 가능했다. 이렇게 볼 때 에라스무스가 쓴 책은 6년 후 루터를 통해서 몰아칠 거대한 폭풍을 예견이나 하듯 나지막한 경고였던 셈이다.

이런 고전 편찬 작업과 함께 에라스무스가 남긴 주요한 공헌은 1516년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한 일이다. 이 성경은 헬라어와 라틴어 대역(對譯)으로 편집되었는데, 한쪽에는 헬라어 원문이, 다른 쪽에는 자신이 번역한 라틴어 역문이 있었다.

이 라틴어 번역은 그가 서문에서,“모든 성경이 전 세계의 여러 말로 번역되고, 시골 농부와 베 짜는 아낙네가 그리고 여행객이 성경 읽기로 지루함을 달래길 바란다”고 썼는데 이로부터 꼭 6년 후 루터는 신약을 일상의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에라스무스의 이상을 성취했다.

개혁의 선구자 메노 시몬스
네덜란드는 루터의 가르침이 잘 자랄 수 있는 땅이었고, 거기서 열성있고 충성된 사람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그 중에 네덜란드의 한 지방에서 메노 시몬스가 일어났다.

그는 원래 로마가톨릭의 교육을 받고 신부로 임명을 받은 사람이었으므로 성경에 대하여는 무지 할 뿐 아니라, 이단에 미혹될까 두려워서 그것을 읽어볼 마음조차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체설의 교리에 대하여 의혹이 생겼을 때에, 그는 그것을 사단의 유혹이라 하여 기도를 하고 고백함으로써 그 문제에서 놓여 나고자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는 결국 신약성경을 연구하게 되고, 루터의 저서를 읽음으로 개혁파의 신앙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후 메노는 로마가톨릭을 버리고 자기가 받아들인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그의 생애를 바쳤다.

이미 독일과 네덜란드에는 광신자의 무리가 일어나 비합리적이요 선동적인 교리를 주장하여 질서와 풍기를 문란케하고 폭동과 모반을 일으켰다. 메노는 이러한 운동이 필연적으로 일으킬 두려운 결과를 알고 광신자들의 그릇된 교리와 무모한 방법에 대하여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잘못된 교리에 잡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우 열렬하게 일한 결과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그는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25년간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을 두루 다니면서 주로 하류 계급을 상대로 활동했다. 제한된 교육 밖에 받지 않았으나 선천적으로 웅변적이었던 그는 불굴의 성실성과 겸손한 정신과 친절한 태도와 진실하고 열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교훈을 자신의 생활로써 실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각 곳으로 쫓겨나서 압박을 받았으나 많은 사람이 그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회개하였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바로 벨기에 지역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신앙고백서의 명칭은 그 교리가 작성된 지역명을 따서 붙여진다. 예를 들어서 “Westminster Confession” 은 영국 런던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었고, “Heidelberg Catechism” 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지역에서 작성되었다.

마찬가지로 벨기에 신앙고백서도 벨기에 지역에서 작성되었다. 그런데 지금이야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별도의 서로 다른 나라이지만,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종교개혁 당시는 ‘벨기에’라는 지역은 네덜란드 남부 지역이었다. 그래서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