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빚

지난 주 신문기사 중에 가슴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감동적인 사연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기사는 뇌종양 환자인 미국의 한 여성이 뱃속의 태아를 살리기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하다가 끝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 미시간주의 캐리 데클라이언이라는 여성은 두통에 시달리다가 지난 4월 병원에서 뇌종양 진단을 받게 됩니다. 뇌 속에서 악성종양이 발견된 것입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여섯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됩니다.

그녀는 일단 수술을 받고 종양을 어느 정도 제거했지만 완전한 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항암치료로 인해 자신의 생명은 연장이 될 수 있지만 뱃속에 있는 태아의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경고를 의사로부터 받게 됩니다.

병원의 의료진은 그녀에게 태아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만 독실한 크리스천인 캐리는 자신의 태아를 지키기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그런 사연이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아무도 그녀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인 닉 조차도 태아를 위한 아내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지 못한 관계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캐리는 지난 7월 말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산모의 생명이 위독했기 때문에 의료진은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임신 24주 만에 딸을 출산하게 됩니다. 1kg 도 안되는 신생아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모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출산 후 3일 뒤에 숨졌습니다.

물론 남편 닉도 언급한 것처럼 캐리는 태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 모성애의 숭고함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제가 더 큰 감동을 받은 것은 어렵게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바로 ‘라이프(Life)’였습니다.
라이프는 엄마의 희생을 대가로 라이프를 받았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라이프는 생명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캐리의 가족들은 아기의 이름을 라이프라고 지었을 것입니다.

그 기사를 읽다가 문득 어느 선교사 한 분이 생각 났습니다. 바로 루비 켄드릭입니다. 미국 남부 텍사스가 고향인 그녀는 1907년 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첫 사역지는 개성 남부감리교회 주일학교 영아부였습니다. 한국말이 서툴었지만 아이들을 향한 그녀의 진심 어린 사랑의 언어는 아이들과 소통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인 1908년 6월 9일에 병이 났고, 열흘 뒤인 19일 스물 여섯 꽃다운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한강변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만일 내게 일천 개의 생명의 있다면 그것을 모두 한국에 주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받은 복음이 그저 어느 날 바람결에 흘러온 것처럼 가벼이 여길 때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오기까지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의 희생이 있었고, 그분의 제자들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생명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례전적 삶을 통해 우리가 받은 생명을 축하하고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교적 삶을 통해 우리가 받은 생명을 그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드리는 것도 아깝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빚을 갚을 준비가 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