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절 어린양 – 이란

아제르바이잔 바쿠 공항에서 23시간의 경유를 거쳐 이란의 대도시 테헤란 공항에 도착했다.

분명 아제르바이잔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시원한 반팔티와 스키니 청바지에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도시적인 세련된 외모의 숙녀들과 아주머니들로 가득한 비행기였다.

그런데 비행기가 테헤란 땅에 착륙하자마자 이 고운 숙녀들이 하나 둘 히잡을 (스카프) 착용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받을 때쯤엔 절반 이상이 차도르까지(무슬림 여성들이 머리부터 검은 천을 둘러 얼굴 전체를 가리는 베일) 걸치니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였다.

처음 숙소를 잡은 곳은 교통혼잡으로 정신없이 분주한 대도시 테헤란이 아닌 이란의 북부지역 카스피해 주변에 위치한 공기 좋은 선선한 도시 라쉬트(Rasht)였다.

이슬람 시아파의 종주국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란에서 그나마 개방적인 편에 속한다는 이 동네 사람들이라 그런지 여성들의 히잡패션도 꽤나 널널하다. 일반적으로 얼굴과 머리의 70프로를 히잡으로 가려야하는 규칙이 있다지만 길가를 활보하는 이 동네 일부 여성들을 보고 있자니 쓴건지 만건지 머리 뒤에 스카프를 살짝 걸쳐놓은 듯한 패션도 보인다.

라쉬트에서 맞이하는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이곳에서 만나게 된 한국인 부부, 이란인 부부 네 분과 함께 도시 외곽에 위치한 산골마을 ‘마살’(MASAL)로 소풍을 떠나는 날이다.

기본적인 영어회화가 가능한 30대의 젋은 이란 부부의 차를 타고 1시간 30분 동안 이동하는 내내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죄다 미국 아이돌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와 저스틴 비버의 곡들이다.

미국의 대이란 경제 제재 조치로 인한 글로벌 사회로부터의 고립이 억울하고 분하기도 할텐데, 이란의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미국의 팝문화와 헐리우드 영화는 오히려 동경의 대상이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있었다.

공기 맑고 푸르른 숲이 울창한 산골 마을의 풍경은 내가 여지껏 머릿속에 막연히 떠올리던 이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산골 도로에 차를 세워놓고 돗자리를 펴고 즉석 숯불에 이란식 닭고기 케밥을 구워 먹었다. 바로 이맛이다!

식사를 마치고는 실외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십 마리의 양떼들이 여유로이 풀을 뜯고 있는 초원이 내려다보이는 원두막 같은 구수한 공간에 방석을 깔고 앉아 처이를 무한 리필해 마시며 이란 젊은 부부가 들려주는 이곳의 사람들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없이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골의 구수한 풍경에 심취해 있던 나의 눈에 심상치 않은 장면이 목격되었다.

건장한 청년 한 명이 터벅터벅 초원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여유로이 풀을 뜯고 있던 양 한마리를 잡아 쓰러뜨리고는 네 다리를 밧줄로 결박하더니 바퀴 하나 달린 작은 수레에 싣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이란인 부인 막후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오늘은 이드 쿠르반(희생절)이라서 수십만 마리의 양들이 전국 곳곳에서 가여운 최후를 맞이할 거야”

‘이드 쿠르반’(파르시) 혹은 ‘이드 알-아드하’(아랍어)라고도 불리우는 이슬람의 희생절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친 사건을 기념하는 이슬람 대명절이다.

이란 뿐 아니라 전세계 무슬림들은 이 날을 가장 중요한 명절 중 하나로 여기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에 가깝게 휴일로 지정해서 기념한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신의 아들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쳤다고 믿는다.

나는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결박된 양이 수레에 실려 끌려가고 있는 곳을 향해 무작정 쫓아갔다. 뒷마당 구석 바닥에 결박당한 한 마리의 순한 양이 처절하게 몸부림 치고 있었다.

목동은 양철 대야를 양 머리 가까이에 가져다 놓고 칼을 집어 들었다. 왼손으로는 양의 주둥이를 단단히 잡고 오른손엔 칼을 쥔 채로 양의 목을 향해 칼을 갖다 대려는 순간.

이제는 저항하는 것도 포기한 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듯한 무고한 양의 서글프고 애절한 눈망울과 눈이 마주쳤다. 아,양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

곧이어 단도에 의해 목의 3분의 2 정도가 베임을 당하고 피가 철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흐르는 피에 나의 미간이 저절로 찌뿌려지고 있었지만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성경에서 수도 없이 읽어왔던 양이 죽임당하는 장면을 중동땅에서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목베임을 당했으나 아직도 살아있는 양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능숙한 목동은 길다란 고무호스 같은 기구를 사용해서 양의 배를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터질듯이 팽창된 배 중심부에서부터 서서히 양모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네 다리 끝까지 깨끗하게 양모를 벗겨내자 벌거벗겨진 양의 고기 몸덩어리만이 남게되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숨죽인 채 카메라를 들고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이런 거였구나… 양 한마리를 잡는다는 것이…’

거룩하고 숭고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양의 목에서 분수처럼 쏟아져 나온 핏줄기로 물든 붉은 땅… 잔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불결하기까지 했다. 구약성경에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었던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제물 이야기들이 더 이상 가볍게 읽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뉴질랜드로 돌아와 다른 중동 출신의 친구로부터 그가 고향땅에서 드렸던 희생제물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귀여운 양 한 마리를 집에 사오셔서 형제들과 함께 지극정성으로 먹이고 쓰다듬고 귀여워해 주었는데 2주 후에 그 양이 바로 희생절을 위해 준비된 제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형제들과 함께 서럽게 울면서 이 정든 양이 도살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는 것이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가 있고 소중한 소유를 드려야만 희생의 참의미가 있기에 그렇게 희생절 2주전부터 양을 사와 정성을 들여 키우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보혈의 메세지가 담긴 찬양을 너무 가볍게 불러왔던 게 아니었는지..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의 명절, 그리고 무슬림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뜨거운 도전을 받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