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ion’

“산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6)”

가장 안타까운 삶은 밤새도록 수고하고도 아무 소득이 없는 삶이다. 차라리 수고하지 않았으면 소득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라도 할 텐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아무 열매도 없다면 얼마나 큰 회의를 느낄까?

내 젊은 날이 그랬다.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받아온 조기교육 하나, 남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 말을 갓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 때부터 이 교육을 받아왔으니, ‘자의식’이란 것이 형성되기 훨씬 전부터 내 꿈은 자연스럽게 ‘회사원’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수험생 시절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디자인’과를 선택했다. 오로지 취업만을 위해서.

어머니의 조기교육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는다. 남자라면 응당 안정적 소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장이 돼야 하지 않는가? 물질적 안정감을 가정에 제공할 수 있어야지. 하지만 어머니의 교육 동기는 그런 상식을 조금 뛰어넘은 것이었다. 평생 사업한답시고 가정 경제를 등한시한 채 떠돌아다니신 아버지에 대한 아픔에서 비롯된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사업은 외딴 섬에 벌여 놓으신 건축업이었다. 마지막 승부수로 집문서까지 저당 잡힌 최후의 한 판. 결국 그 집까지 잃고 근로자들에게 줄 급여도 떨어지자 아버지가 선택하신 길은 일종의 ‘자포자기’였다. 그렇게 사업 터에서 임종을 맞으셨다.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본 어머니는 우리 가정에서 같은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대기업 취업’이라는 비전을 내게 심어주셨다. 상처가 만들어낸 비전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우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대기업에 취업만하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가정의 상처도, 어머니의 고생도, 그래서 대학 생활 내내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다양한 대학생 공모전에 참여하고 영어도 공부하며 입사에 필요한 스펙 쌓기에 청춘을 바쳤다.

모교 대학 강의실 창가에는 내가 가고자 하는 S사의 광고 기획사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곤 했었는데 나는 그 건물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아마도 무슬림이었다면 하루에 다섯 번씩 건물을 향해 기도했을 것이다. 당시 그곳은 나에게 일종의 ‘성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꿈이 성취될 거 같지가 않았다. 그러기에 세상에는 뛰어난 인재가 너무 많았다. 내 나름 그림 좀 그린다는 이유로 대학까지 들어왔는데 그곳에는 나보다 뛰어난 인간들이 훨씬 많았다.

선수들 틈에서 나는 평범했으며 특급 선수는 따로 있었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도 그런 선수는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매 순간 나를 좌절 시켰고, 결국 다른 승부수를 띄우게 했다. 영어 실력 향상에 승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뉴질랜드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뉴질랜드에서 언어도 공부하고 돈도 벌며 영어실력을 스펙에 더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머릿속에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인종들과 섞여 지내며 글로벌 감각을 키우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 감각과 실력을 바탕으로 원하는 기업에 꼭 입사하리라. 그렇게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상상이 깨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뉴질랜드에서 나는 한국 방송을 보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렸다. 타민족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언어를 공부하며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결혼이나 연애 등)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돈이 없었다. 돈을 벌어가며 공부를 해보겠다는 것은 일종의 성공담에 가까웠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치열한 생활 전선에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잠을 쪼개 자며 공부하는 열정적인 청년의 모습은 나 같은 성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사색적(meditative)이고 정적인(static) 인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한인 식당에서 일하다 해고되던(일을 너무 못해서) 날, 숙소로 돌아오던 저녁 무렵이 생각난다. 대기업 취업, 영어 능력 향상, 글로벌 감각, 모두 아득히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날 따라 뉴질랜드 석양은 어찌도 그리 아름다운지. 왜 이놈의 나라는 슬플 때도 이리 아름답기만 할까?

그제서야 이런 생각을 했다.‘나는 뭐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을까? 잘 살고 싶었는데, 정말 잘 사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는데 왜 이리 소득이 없을까? 하나님은 이런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모든 것을 멈추고 기도와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정말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나를 이토록 연약하게 만드셨는가? 나같은 사람은 어디에 쓰일 수 있단 말인가?

자존심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그때 이 말씀이 와닿았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은…”마치 내 고백 같았다. 열심히 살고는 있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청춘. 아등바등 살고는 있는데 하나님과는 무관한 열심. 뭐가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하지?

결론은 ‘방향(Direction)’이었다. 빗나간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열심을 내도 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시 방향을 잡아야 했다. 이 방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혼자서 방향 전환할 자신이 없었기에 YWAM이란 선교 단체의 DTS(예수제자훈련학교)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6개월간 제자훈련을 받으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무엇보다 내 인생의 바른 방향을 잡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내면의 메시지,‘어머니가 나 키우느라 고생하시는 게 싫어! 그 고생을 보상해 드리고 싶어!’이 메시지가 그 동안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정해주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부분부터 수정해 주셨다. ‘어머니는 너 때문에 고생하시는 게 아니야! 네 덕분에 그 고생을 견디고 계신 거야.’ 이 응답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짐 같은 존재가 아니었구나. ‘너 때문에’가 아니라 ‘네 덕분에’로 바뀌었다.

관점이 바뀌자 시선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대기업’을 바라보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시선이 옮겨지자 방향도 바뀌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향을 전환한 지 16년째. 그사이 나는 대기업 사원은 못 됐지만 작가가 되었다. 유명한 베스트 셀러 작가는 아니지만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며 11권의 책을 출간했다.‘화려한 삶’은 아니지만‘내 삶(My Way)’을 쫓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방향이었다.

여전히 결승점이 어딘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고대하던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처음과는 다른 고백을 하는 내가 됐으면 좋겠다.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은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수고도 많이 했고 그만치 풍성하게 잡은 삶이었다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누가복음 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