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Would Jesus Do?

김원일 목사<해밀턴순복음교회>

예수님과 첫사랑에 빠졌던 중학교 3학년 때, 교회학교 교사가 추천해준 기독교 고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CHARLES M. SHELDON)를 읽은 후 W.W.J.D(What Would Jesus Do?)라고 새긴 손목밴드를 차고 다녔다. 오른쪽 손목의 밴드가 보일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묻곤 했었다.

만약 예수님이 오늘 여기에 계셨더라면? 코로나19로 전 인류가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는 2020년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한복음 11:21, 32).”라고 말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마음으로 가정해 보면. 확신하건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는 이까짓 바이러스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피조물의 자연법칙을 설계하고 창조하신 분이 과학과 의학에 제한을 받으시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상식의 울타리 아래에서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믿는 자에게 기적을 베푸셨다. 생명과 부활의 주님이 오늘 여기에 계셨다면 죽음의 위협과 고통에서 치유하시고, 생업을 잃은 많은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셨을 것이다. 방역이란 이유로 예배를 허락받아야 하는 참담한 상황을 한순간에 정리하시고, 모든 무릎으로 예수님 이름 앞에 꿇게 하지 않으셨을까?

30여 년이 지나 이제는 아홉 살 딸 아이가 좋아하는 눈에 띄는 밝은 색상의 손목밴드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라면 무엇을 원하셨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지 십자가에서 밝히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질문은 다양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정답에서 발견된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의 관심은 정치적인 힘을 갖는 것에 있지 않았다. 수많은 군중이 따르는 인기에 있지 않았다. 신비한 기적과 이적에 있지 않았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십자가에 있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립보서 2장 7절~9절)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의 피를 흘리신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에는 반드시 감사와 찬송이 가득했어야 했다. 눈물과 회개로 날 대신해 생명 주신 은혜에 엎드려 절하며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 지고 걸으신 길에는 죄인들의 손에 팔리어 이리저리 끌고 가는 수치와 조롱으로 가득했다. 사랑하는 제자들도 외면하는 외로움과 배신도 있었다. 수많은 기적과 이적으로 환호했던 군중이 돌변하여 먼지를 날리며 아우성치는 저주와 모욕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육체와 정신이 죽을 만큼 괴롭고 낙담되는 괴로운 거리를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을까? 예수님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셨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도리어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저들의 무지함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하셨다(마태복음 12:19, 요한복음 13:1, 누가복음 23:34).

코로나 대유행 위기에 한국 교회를 향한 비난과 책임 전가가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다수 교회가 방역에 솔선수범하고 국내외 선교와 사회봉사에 헌신해왔음에도 억측과 오해로 온 교회가 매도당하고 비대면 예배만 허락한다는 말도 듣는다. 교인이라는 이유로 직장과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주님의 몸인 교회와 지체된 성도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기고 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예수님 뒤를 따라 십자가로 향하는 길이다. 교회와 성도들이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비난과 책임 전가의 대열에 동참하여 다투고 들레는 것은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복음과 은혜를 몰라 오해하고 마음 둘 곳을 몰라 소망없이 방황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자. 세상 사람들에게는 묵묵히 기도하는 우리가 더 미련해 보일 수 있겠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린도전서 1:18)이 드러나게 되는 예수님 보이신 완전한 승리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던 무리도 있었다. 고초를 받은 예수님의 몰골을 보고 펑펑 울었던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의 흐느낌과 탄식이 오늘도 들린다. 우리의 통곡 소리에 묻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누가복음 23:28-29)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우리가 대면하는 환란, 조롱, 핍박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교회와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당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뿐더러,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마서 8:35-39)고 십자가의 도를 앞서 걸은 바울은 단연코 선언했다.

영혼을 위해 울며 기도할 때이다. 둘러싼 고난이 십자가 처럼 느껴질때가 영혼을 위해 생명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할 때이다. 지금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이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울며 기도하면 된다. 원수 된 것을 소멸하는 용서와 회복(에베소서 2:16)의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 시대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다음 세대를 위해 울며 기도하자. 자녀들은 십자가의 길과는 정반대인 세상 가르침에 둘러싸여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너의 주인은 너야, 성 정체성, 생명도 선택할 수 있다고 배운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는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길이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2:20).

사랑하는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십자가의 길을 걸은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인생의 도전과 문제 앞에 예수님의 방법으로 하면 지금은 손해인 것 같아도 완전한 승리를 경험하는 과정을 자녀들이 본다면,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크건 작건 맡겨주신 사명을 기쁨과 감사로 감당하는 충성의 발자취를 남긴다면, 자녀들이 그 뒤를 따라 걸어 함께 하늘에서 면류관 받는다면 가장 큰 행복일 것이다.

때론 실족하여 넘어져도 다시 주님께 가까이 가는 부모의 회개 눈물을 본 아이들은 세상의 어떤 가르침보다 위대한 울림으로 십자가의 길에 머무를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환난 중에 우리로 흔들리지 않게 하려 장차 받을 환난을 이미 알려주셨다. 그리고 홀로 두지 않으시고 모든 발걸음에서 우리를 도우신다(데살로니가전서 3:3-4, 히브리서 2:18).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이 여기에 저기에 있다 주장하지 말고 온 가족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안식하고 승리하는 지혜로운 성도님과 가정되시길 기도드린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