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마지막 수업(The Last Class)은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es Daudet)의 단편 소설이다. 알퐁스 도데가 1873년에 출간한 단편집 ‘월요 이야기’에 수록된 글인데, 보불전쟁(The Franco-Prussian War)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여 알자스-로렌지방을 독일에게 빼앗긴 시대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살던 소년 프란츠(Franz)는 그날도 아침 늦게까지 학교에 가지않고 있었다. 아멜(Hamel) 선생님이 프랑스어 문법에 대해 질문하신다고 했는데 준비를 하지 못해 혼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멜 선생님은 학교에 늦은 프란츠를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야단치지 않으셨다. 교실은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동네 어른들이 슬픈 표정으로 앉아계셨다. 아멜 선생님의 옷차림도 특별했다. 특별한 날에나 입던 예복을 차려 입으셨다.

아멜 선생님은 “오늘로 여러분의 프랑스어 수업은 마지막입니다”라고 말했다. 내일부터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학교에서는 독일어만 가르치라는 명령이 베를린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이다.

프란츠는 자신이 프랑스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않은 것을 그제야 후회했다. 문법을 처음부터 틀리기 시작하자 프란츠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아멜 선생님은 더 열심히 가르치지 않은 자신과 부모들의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프로이센 사람들이 우릴 비웃고 있다. ‘뭐라고? 너희가 프랑스 사람이라면서 프랑스어를 쓰지도 읽지도 못한단 말이냐?’ 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우린 할 말이 없구나. 너희들의 부모님은…돈 몇 푼을 벌기 위해 너희를 밭이나 공장으로 보냈지. 나 역시…너희가 송어 낚시를 하고 싶다고 하면 수업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멜 선생님은 프랑스어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며 실질적인 언어(the most beautiful language in the world, the most clear, the most substantial) 라고 강조했다. 한 민족이 남의 식민지가 된다고 해도 자기 언어를 잘 지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문법시간 후 아멜 선생님은 자습할 쓰기본을 나눠주었다. 거기엔 “프랑스, 알자스, 프랑스, 알자스”라고 쓰기 연습할 말이 주어져 있었다. 프란츠는 학교지붕에서 비둘기가 구구구 울고 있는 소리를 들으며, “저 비둘기들에게도 이제 독일어로 울라고 할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다.

정오를 알리는 교회 탑의 큰 시계소리가 들리고 프로이센 군의 나팔소리가 들리자, 아멜 선생님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교단에 올라섰다. 아멜 선생님은 “여러분, 나는, 나는…” 하다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멜 선생님은 칠판을 향해 돌아서서 분필을 집어 들고는 Vive La France! (프랑스 만세!) 라고 쓰셨다. 될 수 있는 한 큰 글씨로.

이 소설에서 아멜 선생은 프랑스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말한다. 그 말은 프랑스가 곧 자신의 조국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맞물려있을 것이다. 뉴질랜드에 사는 우리 한인 이민자도 그렇지 않은가? 영어국가에 살면서도 한국어에 대한 우리의 자긍심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간다.

세종대왕은 어떻게 이처럼 기막힌 언어를 만들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은 성경에 등장하는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연상시킨다.

고레스 왕은 에스라 1:3에서 하나님을 참 신이라 말하고 이사야 45:1에선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불리긴 했지만, 역사적으로 오직 여호와만 섬기는 유일신 신앙인으론 볼 수 없는 자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를 쓰셨다.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온 이스라엘 백성을 유다로 돌려보내 성전을 건축토록 한 것이다(스1:1-4).

이 사례를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필시 세종대왕도 하나님이 쓰신 왕이란 생각이 든다. 후대의 한국 크리스천이 읽을 성경언어를 만들 수 있도록 성령의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임하셨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이민1세대로서 한국어가 서툰 이민2세대를 만나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걱정되는 일은 우리 조국의 한국어가 갈수록 변질되어가는 현실이다.

세상이 강퍅해서인지,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에베소서 4:31) 언어가 횡행한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숱한 욕들이 헬 조선(Hell朝鮮)을 부추기는 선봉장 노릇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에베소서 4:29 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한다. 세종대왕을 통해 하나님이 성경의 언어로 주신 한국어가 더럽혀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영어도 미국 영어, 영국 영어, 뉴질랜드 영어가 조금씩 다르듯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대한민국의 한국어와 해외 디아스포라의 한국어가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그럴 때, 뉴질랜드의 이민자가 간직한 한국어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보존되어있길 소망한다.

‘마지막 수업’을 읽는 독자는 <관점>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 작품의 감상엔 크게 두가지 관점이 있다. 보통은 작가가 쓴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패전후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 시간에 “프랑스 만세”를 칠판에 쓰는 아멜 선생이 클라이맥스다. 이 장면은 마치 일본 식민지 시대에 더 이상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된 국어 선생님이 “대한독립 만세”를 칠판에 쓰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것이 이 소설에 대한 일반적 해석이다.

그러나 전혀 상반된 관점도 있다. 알자스 지방은 오랜 기간 독일 영토였는데, 프랑스가 잠시 점령했던 것을 독일이 보불전쟁의 승리로 되찾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아멜 선생이 칠판에 “프랑스 만세”를 쓴 것은, 일본이 2차대전 패전 후 한국을 떠날 때 일본어 선생이 “일본 만세”를 쓴 것과 다름없다는 해석이다.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 우파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의 정치적 성향이 ‘마지막 수업’의 플롯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소설예배의 목적이 문학비평은 아니므로 여기서 어느 관점이 더 타당한지를 논할 계제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이처럼 두가지 상반된 해석을 대하면서, 소설을 읽을 때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지금 우린 어떤 관점으로 소설을 읽고 있는가? 소설예배의 관점은 명확하다. 오직 성경이다. 성경의 눈으로 소설을 읽는 것은 큐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묵상 가운데 성경의 교훈을 찾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소설엔 온갖 형태의 삶이 픽션으로 담겨있다. 상상 속에서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다. 그럴 때 소설예배는 생활예배의 훈련장이 된다.

이사야 45:15은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일터에서, 쇼핑몰에서 모습을 감추고 계신다. 그러나 성경이 내 눈이 될 때, 우린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소설 역시 그렇게 성경의 눈으로 읽을 때, 우리는 픽션을 통해 그분을 닮도록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