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굴의 다니엘’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사자 굴로 들어간다. 그들의 왕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이다. 노인은 쉽게 말해 정치적 계략에 걸려든 것이다. 그를 제거하려는 정적(政敵)들로부터……

4번의 왕권 교체, 2번의 제국 교체. 거대한 과도기 속에서도 노인은 살아남았다. 아직 핏기가 마르지 않은 앳된 십 대의 얼굴로 첫발을 내디뎠던 낯선 제국 생활. 그때도 소년 시절의 노인은 돋보이는 아이였다.

지식과 지혜에 막힘이 없을 만큼 총명했으며 총명한 만큼 또한 순수했다. 상반되는 개념인 총명함과 순수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에 제국의 관리들은 그를 우대해 주었고 또래들은 시기했다.

그 특유의 총명함과 순수함으로 고위 관직까지 올랐으며 4번의 정권교체 속에서도 사회적 직위를 유지했으니 그 정도면 식민지 출신의 이등 국민으로서 성공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어딜 가나 이방인이었다.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을 줄 수 없었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출세와 성공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

그의 관심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조국 ‘이스라엘의 회복’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회복을 가져다 주실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평생을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마음의 고향이었으리라……

80년의 세월이 흘러 위기가 한 번 더 찾아왔다. 왕에게 절하지 않으면 사자 굴에 던지겠다는 왕명이 떨어진 것. 왕명은 한 번 나오면 되돌릴 수 없다. 그만큼 지엄한 것이다. 그 왕명을 이용한 정적들의 계략에 제대로 걸려들었고 이번에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노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믿음이란 늘 대세를 거스르게 마련이고, 오래 전 풀무 불에서 살아 나온 경험도 있지만, 그런 일들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더구나 거기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면……
그는 이 문제로 고민하고 씨름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선택은 동일했다.

80여 년의 세월 동안 그가 지켜온 한 가지 원칙,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 그렇게 사자 굴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그의 발걸음은 ‘의연함’과는 거리가 있고 ‘용감함’과도 좀 다른, 독특한 마음의 어떤 상태였다.

그것은 ‘내려놓음’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 생존의 욕구로 가득 찬 자아를 완전히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 그럴 때 따라오는 약간의 인간적 두려움, 불안함. 그러나 더 큰 소망에 대한 기대. 언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결합되어 ‘평안’이라는 최종적 형태로 완성된다. 그것이 진정한 내려놓음이다.

80년의 세월을 돌아보니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후회는 없다. 감사하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 권한이 아니다. 살아서 나올 것을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고 들어간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18, 다니엘의 세 친구 고백)

이런 심리적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로 결정할 때의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그 마음의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 단순한 자포자기? 아니다. 자포자기와는 조금 다를 것 같다.

나는 그런 다니엘의 복합적인 표정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너무 의연해 보이거나 용감해 보이기보다는 자유한 듯한,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좀 지쳐 보이는……

아직은 내공이 부족해 이 모든 것을 그림으로 담아내기가 쉽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상해 주시길.

성경의 구절과 구절에 다 담기지 못한 인간의 감성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것. 그것은 신학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심리학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다. 예술과 문학의 역할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림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더 깊은 묵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기독교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림묵상’이 크리스천 라이프를 구독하시는 모든 분과 함께 다니엘이라는 인물 속으로, 그리고 ‘성경’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더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