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와 해밀턴 한인교회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 변화와 성령의 역동성 구해야<함태주 목사/해밀턴 한인교회>

예상치 못한 큰 자연 재앙(홍수, 기근, 지진 등)이나 엄청난 피해자를 낳는 전염병이 일게 될 때 모든 것을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특히 교회의 리더들은 더욱 불편하다. 벌어지고 있는 그 엄청난 사건에 대해 해석을 해야 하고, 또 해석을 요구하는데 꼭 맞는 답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답을 찾는 것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건에 대해 특별한 언질을 안 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사건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 사건을 보편적인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오늘의 사건을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성경의 특수한 사건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 결과 각종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 것이 그 지역 혹은 그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쉽게 규정하게 된다.

자연 재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원전이 파괴되었고, 무려 2만 명에 육박하는 사망 및 실종자가 발생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만큼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때 어떤 교회 리더는 ‘하나님을 안 믿고 과거를 회개하지 않고 오만을 떨더니 그거 봐라’ 하는 식으로 그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사회에게서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도 그런 시각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으로 볼 여지도 있겠지만, 상식적인 입장에서 보는 이해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독교는 시대에 맞지 않는 우스운 모습을 가진 것으로 조롱당하고 사회의 뉴스거리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그런 끔찍한 재앙을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명백하게 그 재앙이 하나님께서 하신 심판이라고 말할 만한 자료가 없다. 이것이 구약에 등장하는 심판의 사건과 신약시대에 그리고 근자에 일어나는 사건과의 다른 점이다.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 속에 일어나는 일
구약의 경우 하나님이 심판할 때 반드시 그 이유를 미리 말씀하시고 시행하셨다. 바로에게 10가지 심판을 내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미리 말씀하셨다. 또 출애굽 하여 광야의 길을 갈 때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기를 든 사건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임을 분명히 하시면서 반기든 자들을 여호와의 불로 2백 50명을 심판하신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본 동조하는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고 불평하며 부당하게 책임을 전가하자 하나님께서 이제는 백성들을 심판하신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 미리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회중에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민수기 16:45) 다윗이 하나님보다 군대의 숫자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인구 조사를 하여 심판을 받을 때도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해 미리 말씀하시고 시행하셨다(삼하 24:12-1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도구로 전염병 같은 것을 사용하되 그 이유 분명히 하셨고, 그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그러나 신약 시대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연재해가 있었고 전염병이 창궐한 비극적인 사건도 역사 속에 많은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바, 이런 사건을 굳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려 하거든 사회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심판이라 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다윗이 잘못 하자 백성이 심판받았듯이, 교회가 나태하고 변질하고 부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심판으로 좁혀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 속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게 된 사건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여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13:4-5).” 실로암 망대가 왜 무너졌을까? 틀림없이 잘못된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말씀대로 순종하는 길 가야                                                              

그 일을 당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죄받았네 죄 받었어”하고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마치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특별하고 더 악한 죄가 있어서 벌 받았다고 말이다. 주님은 죄에 대해서는 피차 일반이라 말씀한다. 망대에서 죽은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고였을 뿐이다.

주님은 그 사고를 망대에서 죽은 자들보다 깨끗한 것처럼 여기는 자들에게 경고로 사용하신다. 사고이지만 심판처럼 이해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사 회개할 기회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성도와 교회는 사회적 재앙과 사건이 있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로 이해하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회개하며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길을 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구약의 명백한 심판의 모습과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실은 대부분이다. 로마서 1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길을 가는 자들을 제멋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육체적 도덕적으로 더러움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다.

즉 마음의 죄가 뜻하는 대로 끌려가게 내 두신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죄의 욕심을 따라 걸어간 죄의 열매를 스스로 거두게 할 뿐 아니라, 이웃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쓴 열매를 자취하게 하신다.

죄와 탐욕의 쓴 열매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16세기 유럽의 스페인이 탐욕의 눈으로 남아메리카를 유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스페인 사람과 함께 유입된 천연두 균으로 인해 당시 남아메리카 인구 1억 명 중 90퍼센트가 목숨을 잃었다. 그때 과테말라 잉카제국도 천연두로 초토화되었다. 이 얼마나 쓰디 쓴 비극의 열매인가? 죄와 실수와 잘못과 탐욕으로 벌어지는 모든 쓴 열매를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지는 않는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말씀대로 운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코비드 19의 창궐도 단순한 바이러스의 공격이 아니라, 우리가 육신의 생각을 좇은 그대로 스스로 그 쓴 열매를 거두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코비드 19의 창궐과 그 죽음의 쓴 열매에 대하여 이는 육신의 생각을 좇은 우리의 삶이 스스로 거둔 열매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회개하라 경고하신다는 것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마음과 삶을 새롭게 하되 나의 영역뿐 아니라, 이웃과 세계의 관계 영역까지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꿈도 못 꾸던 온라인 예배 인프라 구축돼
신학적 이해가 어떠 하던지 간에 처음 겪는 팬데믹을 우리는 모두 얼떨떨한 가운데 맞이하게 되었다. 정부에서 여러 대응 단계별 행동 수칙을 수시로 알려주었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 적용하려 할 때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함태주 목사<해밀턴 한인교회>

우리 교회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건물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 스스로 여유 있게 조정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해밀턴의 한인 교회 중 한 교회는 팬데믹이 발표되기 전에 사전에 아무 상의 없이 교회당을 폐쇄 조치하는 무척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민족이 아니던가, 또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아닌가? 이렇게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발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며 예배당 없이 예배드리는 방법을 얼른 찾아냈고 예배가 계속 되게 했고, 성경 공부와 교제가 지속되게 했다.

우리 교회는 팬데믹이 시작될 때 이는 깨어 기도하라는 뜻임을 즉시 헤아려 더욱 힘을 내어 각 처소에서 예배했고, 더욱 열심히 새벽기도를 실시간 중계로 했다. 고난주간에 하기로 계획된 특별새벽기도회를 실시간 중계로 진행했다. 수요예배도 물론이다.

교우들도 우리 교회가 생중계로 예배가 진행되고, 이것이 유튜브에 뜨는 것이 신기했던지 더욱 관심 있게 참여하고 큰 관심을 두고 예배에 참여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인터넷 생중계 예배를 하다 보니 초기에는 실수도 잦았다. 우리 교회는 프리즘이라는 앱을 사용했는데, 이것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 보니 일어난 실수들이다. 지난번 실수한 것을 바로 잡으면 이번에는 다른 것이 잘 안 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한 번은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나중에 예배를 마치고 확인해 보았더니 화면의 좌우가 바뀌어 방송된 예도 있다. 교독문도, 찬송가 가사도, 본문 말씀도 다 좌우가 바뀌어 나갔으니 성도들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생각할 때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궁여지책으로 간단한 무료 앱으로나마 실시간 중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팬데믹 같은 일들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우리 같이 규모가 적은 교회도 인터넷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마련하여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비드 19 팬데믹 이전엔 대단한 방송 설비와 전문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꿈도 못 꾸었는데 이미 모든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영상을 함께 보고 있는 주일학교 어린이들

팬데믹을 이겨 나가기 위한 정보교환 절실
인터넷 실시간 중계 예배는 예배당 예배가 아니어도 교회 일원이 각 처소에서 한 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게 했다.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은 성도들이 예배에 참여하게 했다. 게다가 소수이지만 다른 교회 성도들도 참여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인터넷상에 저장된 예배를 다시 활용 하는 성도들도 있었다. 주일을 제외한 새벽기도회의 경우 예배당에서 드릴 때는 소수가 참여를 했다. 실시간 중계로 기도회를 인도하자 훨씬 많은 가정이 참여한다. 지금도 새벽기도회만큼은 인터넷 실시간 중계로 기도회를 이어가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더욱 간절히 기도의 부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문제는 성도 간에 교제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줌이라는 앱을 사용했으면 훨씬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사용하고 있는 앱도 낯선데 또 다른 것을 추가하여 운영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올해 초 새로 오신 새 가족들의 경우 교제의 관계가 형성되기도 전에 팬데믹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으론 전 교우가 참여하는 단톡방을 통하여 수시로 정보를 교환했고, 서로 격려하며 힘을 주는 인사와 영상과 글을 나누며 팬데믹을 함께 이겨 나가게 했다.

뉴노멀 2.0 시대 맞은 교회의 변화 촉구
숭실대학교 대학원 IT 유통물류학과 최형광 교수는 한 칼럼에서 뉴노멀 시대는 “비대면 활동, 신기술활용, 온라인 비즈니스, 개인주의 성향, 안전 지향 및 지속가능성”이란 가치가 부각되고 표준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른바 뉴노멀 2.0시대로 진입되는 것이다. 우리는 벌서 이러한 모습을 팬데믹 기간에 경험했다.

앞으로는 비대면 서비스가 더욱 활성화되고, 신기술을 활용하는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이 더욱 빠르게 전개되고, 온라인으로 훨씬 효율적이고 빠른 정보 교환과 업무가 이루어질 것이다. 개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안전과 지속 가능성이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앞으로 이러한 새 표준이 제공하지 못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도태될 위험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예상되어 왔지만, 이번 코비드 19의 확산과 팬데믹을 계기로 더욱 빠르게 전개되고 그 방향이 급격하게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사람과 문화가 이젠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 변화를 막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재앙은 예외 없이 그 당시의 사회를 요동치게 했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흑사병은 르네상스와 같은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추구하는 낙관주의를 가져왔고, 중세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회를 탄생시켰으며, 18세기에는 영국 국교회에서 감리교회를 탄생시키기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전염병과 교회, 역사에서 배운다, 이용연 목사)

비대면 교회 활동 속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 집중
첫째 점점 더 비대면 교회 활동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에 따라 비대면 활동에 맞는 프로그램과 활동들이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와 교회 지역과 지역의 경계가 허물어질 것이다. 이 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가 등장 할 수 있다. 셋째, 신선한 디지털 기술로 무장 해야 할 것이다. 넷째, 개인주의 성향이 점점 짙어지는 문화 속에서 참 공동체성과 성령의 역동성을 더욱 구할 것이다.

이제 교회의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제는 한 번의 공예배가 중요하고, 비대면 교회 활동 속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위한 집중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