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셋째 주 찬송/7월 넷째 주 찬송

7월 셋째 주 찬송/10장(통일34장) 전능 왕 오셔서

3박자 × 3마디 × 3운율의 완전한 삼위일체 찬송
“예배 첫머리에선 찬송(Hymn)을 불러야 합니다” 지난 월요일 일간신문 종교 면 머리에 큼직하게 장식한 필자의 인터뷰 리드입니다.

최근 기독교 TV와 인터넷으로 연재해 온 글을 모아 ‘김명엽의 찬송교실’(예솔)을 시리즈로 출간했는데, 그 내용을 담은 기사입니다. “그런데 언뜻 이해가 안 간다.

그렇다면 지금껏 불러온 찬송은 무엇이란 말인가. 김 장로는 이를 위해 먼저 ‘찬송가(Hymn)와 복음가(Gospel Song)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배시간에 즐겨 부르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울어도 못하네’는 찬송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들 노래는 ‘가스펠송’이다.”

신문을 받아 본 그 날, 전국에서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실은 머리기사에 ‘예배와 음악의 상징을 살린 찬송해설집 출판’이라거나, ‘교회음악의 역사와 찬송가학을 두루 살핀 찬송해설집 출간’이라거나 하는 표제를 바라고, 내심 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내용의 리드를 아쉽게 여긴 터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내가 무슨 새로운 법이라도 만들어낸 듯, 공감하면서 대대적으로 계몽시켜달라니 더더욱 의아해 할 수밖에요. 그러고 보니 예배 때에 찬송을 부르지 않는 교회가 상당히 많은 가 봅니다. 또 찬송가에 있는 곡이니 주일예배 첫 찬송도 그냥 생각 없이 아무 곡이나 부르곤 했던 모양입니다.

찬송가 앞표지를 넘기면 ‘머리말’ 다음에 ‘차례’가 있고, 그 밑에 ‘제목 분류’가 있는데, 이는 예배와 집회 시 적절한 선곡을 위해 내용 별로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 첫 찬송은 ‘예배’(1-62) 항목 중 ‘경배’(8-17), ‘찬양’(18-41), ‘주일’(42-48)과 ‘성부’(63-79) 중에서 택하면 틀림없습니다.

찬송 시 ‘전능왕 오셔서’는 영국의 감리교 운동 초기인 1757년경,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가 만든 작은 전도용 책자(Collection of Hymns for Social Worship)에 작곡자 이름 없이 출판되었습니다. 작자미상으로 되어 있으나 간혹 찰스 웨슬리 작사로도 보는 이가 있습니다. 처음엔 영국 국가인 ‘피난처 있으니’(70장)의 곡조 AMERICA에 붙여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곡조인 ITALIAN HYMN은 당시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인 바이올리니스트 좌르디니(Felice de Giardini, 1716-1796)의 곡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 곡이 그가 말년 러시아에서 활동하였기에 MOSCOW란 다른 이름도 있습니다.

이 찬송은 좌르디니가 1769년 런던의 록(Lock)병원에서 병원용 찬송가책을 만들면서 병원장이 이 가사에 곡을 붙여주길 원하여 작곡하였습니다.

‘전능왕 오셔서’는 음악형식 상 가요형식(歌謠形式)인 4마디+4마디가 아니라, 3마디(전능 왕 오셔서) + 3마디(주 이름 찬송케) + 2마디(하옵소서)의 불규칙적 구조입니다.

왜일까요? 마디만 3마디일 뿐 아니라 박자도 3박자, 운율도 ‘전능 왕’(3) ‘오셔서’(3)의 3운율 아닙니까. 1절 성부, 2절 성자, 3절 성령, 4절 삼위일체를 찬미하는 찬송이기에 그러하지 않을까 해석해 봅니다.

7월 넷째 주 찬송/66장(통일20장) 다 감사드리세

맘 병들 때 은혜로 지키사 이 세상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
때로는 가장 큰 감사의 표현이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서 태어납니다.

링카르트(Martin Rinkart, 1586-1649)목사의 코랄 ‘다 감사드리세(Nun danket alle Gott)도 마찬가지. 역사학자 매언즈(James Mearns)는 링카르트의 사역과 찬송을 요약했습니다.

링카르트의 사역은 대부분 30년 전쟁(1618-1648)의 공포 속에서였습니다. 성벽도시인 아일렌부르크(Eilenburg)는 전역에서 피해 온 정치적, 군사적 피난처가 되었고, 그 결과 인구밀집과 치명적인 역병과 기근으로 고통의 지역이 되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겹치는 전쟁으로 재앙이 심각해지자 공직자들도 도시를 떠나고 두 명의 성직자마저 숨져 링카르트는 유일한 성직자로 남아 하루에 50명, 무려 4,480명이나 되는 장례를 집례 했습니다.

사망자의 수가 절정에 달할 땐 장례식 없이 도랑에 묻히기까지 했습니다. 도시는 천여 가옥 중 8백여 채가 파괴되고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링카르트는 자신의 가족을 돌보아야하는 어려움에도 자신의 집을 희생자들의 피난처로 제공하였고, 종래 아내도 자신의 손으로 땅에 묻었습니다.

찬송 시 ‘다 감사드리세’는 1630년경 8행 3절로 지어(Meisnische Thränen-Saat,서문, Leipzig, 1637) 자신이 1636년 라이프치히에서 발간한 소책자(Jesu Hertz-Buchlein)에 ‘식사기도’(Tisch-Gebetlein)란 제목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작시일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ia)평화조약 후 널리 불려 졌다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곡명 NUN DANKET는 크뤼거(Johann Cruger, 1598-1662)가 작곡하여 1647년 그의 찬송곡집(Praxis Pietatis Melica)에 처음 출판했습니다. 멘델스존은 이 코랄을 교향곡 2번 ‘찬양의 노래’(Lobgesang, Op.52) 제8악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찬송은 가장 어렵고 비참한 30년 전쟁 중에서도 가족이 식사 나누기 전에 불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의 ‘대감사가’(Te Deum)로 불립니다. 전쟁과 죽음, 폐허의 잿더미, 질병과 기근 가운데서도 식탁 앞에서 감사하며 “몸과 맘 병들 때 은혜로 지키사 이 세상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2절)라 기도했을 것을 생각하면 욥(욥기1;21)을 연상케 하며 마음을 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