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의 “삼국지 연의”

“하늘이시여, 여기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서로 성은 다르지만, 오늘 이렇게 모여 형제의 결의를 맺습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겠습니다. 저희들의 간절한 뜻을 받아 주소서. 같은 날에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하늘이 맺어준 의형제로서 한 날 한 시에 죽겠습니다.”

‘삼국지 연의’(Romance of the Three Kingdoms)는 14세기 중국 명나라 때 나관중(Luo Guanzhong)이 쓴 소설이다.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유명한 동양 최고의 고전 중 하나다. 삼국지 연의는 삼국지의 정사가 아니며, 실제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약 백 년간)보다 1천년 후에 쓰여진 역사소설임을 기억해야 한다. 연의(演義)가 곧 역사소설이란 뜻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후한 말기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 중에 유비가 있었고, 그는 관우, 장비와 더불어 도원(桃園, 복숭아밭)에서 형제의 의를 맺는다.

황건적의 난에 이어 동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조조를 도와 반란군을 격파하였지만, 권력을 잡은 조조는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는 독재정치를 일삼는다.

이에 맞서 유비는 한고조 유방의 후예로서 한실 부흥의 꿈을 품고 당대의 실력자 조조에 맞선다. 유비는 아직 정치적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지만, 제갈공명을 군사로 얻으면서 그가 설파한 천하 삼분의 비전을 품고 도전의 길을 나선다.

마침내 적벽대전에서 손권과의 연합으로 조조에게 대승을 거둔 유비는, 이후 조조의 위나라 그리고 손권의 오나라와 자웅을 겨루는 촉나라를 세움으로써 대망의 삼국시대를 연다. 그러나 관우의 죽음 이후 장비가 암살되고 유비, 공명마저 병사하자 촉은 힘을 잃게 되어 위나라에 복속된다. 그리고 위의 뒤를 이어 사마씨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고 진의 시대가 막을 올린다.

삼국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유비가 제갈량(자: 공명)의 초가집을 세 번에 걸쳐 찾아가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일 것이다. 그때 제갈량은 서천 54주의 지도를 쭉 펼쳐놓고는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설파한다.

“장군이 패업을 성취하시려면 일단 북쪽은 하늘의 때(天時)를 얻은 조조에게 양보하고, 남쪽은 지리 (地利)의 이점을 차지한 손권에게 양보하고, 장군은 민심(人和)을 얻어 먼저 형주를 차지한 다음 서천을 취해서 정족지세(鼎足之勢: 3개의 솥발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이룬다면, 후에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는 제갈공명의 비전을 듣고 즉시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천하삼분과 중원도모! 이는 어릴 적 돗자리를 팔고, 황건적의 난에선 단지 의병에 불과했던 유비로선 감히 품기 어려운 큰 꿈이었다. 특히 당시 유비는 번번이 전쟁에서 패해 형주의 유표에게 겨우 몸을 의탁하고 있는 신세가 아니었던가?

이 장면을 대하면, 성경의 마태복음 28장이 생각난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이었다. 패잔병 같은 11명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태복음 28:19)라고 명하시는 장면이다.

천하삼분지계를 듣고 있는 유비의 모습이 그때 11명의 제자들과 겹쳐진다.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을 누구보다 잘 아셨다. 삼국지로 치면, 그들은 조조나 손권이기 보단 딱한 처지의 유비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모든 족속을 복음화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마태복음 13:31-32에서 주님은 이를 겨자씨에 비유해 설명해주신 바 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같은 주님의 제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2천년을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교회는 마지막 때에 이르러 ‘미전도 종족’의 남은 숫자를 세어가며 주님의 재림을 카운트 다운하기에 이르렀다.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생각해보자. 세상이 전혀 주목하지 않았음에도,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겠단 뜻을 품고 한날 한시에 죽을 결연한 각오를 바쳤다.

뜻이 사람을 모은다. 주님도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교회는 감히 음부의 권세 따위가 어찌할 수 없는 예수의 몸, 그 자체가 되었다(마태복음 16:16,18).

오늘날 우린 너무 상식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꿈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던 기억이 혹 아련한 옛일로 흘러버리진 않았는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다면 이제라도 결단하고 일어서자. 그리고 동역자를 찾자.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4: 12). 예수 안에서 형제의 의를 맺는 동역자를 달라고 기도하자.

유비가 삼고초려할 당시, 제갈량은 비록 초야에 묻혀있긴 했지만 경륜과 지략이 뛰어나 방통과 더불어 복룡봉추(伏龍鳳雛)로 알려진 인재였다. 그토록 뛰어난 제갈량을 얻기 위한 유비의 삼고초려조차 겸손지덕으로 칭송 받는 것이라면, 우릴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떠한가?

찬송가의 아버지, 아이작 와츠(Isaac Watts)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새 찬송가 143장)라고 노래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벌레 같은 우릴 위해 이 낮고 낮은 땅에 임하시어 죽기까지 위하신 예수님. 그분의 겸손을 어찌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삼국지 연의엔 주군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장수들의 모습이 곳곳에 담겨있다. 장수들은 주군이 잘되었을 때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패배해서 절망에 이르렀을 때도 주군을 배신하지 않는 단심. 목숨조차 초개같이 버리는 기개. 그들의 충절은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는다.

그런 삼국지의 장수들과 달리, 성경에서 주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이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에 잡혀 대제사장의 관사로 끌려갔을 때였다.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는 모닥불 곁에 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누가복음 22:54-62).

그런데도 주님은 부활 후 배신의 길을 걸었던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더 나아가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21: 15-17)는 사명까지 맡기셨다.

제갈량이긴커녕 몹쓸 죄인에 불과한 우릴 위해(로마서5:8), 삼고초려를 훨씬 뛰어넘는 성육신의 비하와 십자가의 고통까지 감내하신 주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조차 용서하신 주님. 비록 우린 삼국지의 기라성 같은 영웅들보다 한참 못한 존재들일지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선 삼국지의 어떤 주군보다 뛰어난 주군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빌립보서 2:9에서 예수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the name that is above every name)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제자의 길이 주를 위해 살고 죽는 길(롬 14:8)이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제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누가복음 9:23)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린 어떤가? 우리도 고난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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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연세대정외과 졸업, 코람데오 신대원 평신도지도자 과정 수료하고 네이버 블로그 소설 예배를 운영하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조건도 구원에 덧붙여져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어른이 읽는 동화의 형식에 담아 연재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