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매니저

최근 몇 년 동안 언론에 종종 등장한 유진 박은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눈빛은 항상 멍한 상태로 어느 곳을 응시하는지 알 수 없고,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가 또 갑자기 씨익 웃기도 한다.

부산 시청 홀에서 사흘 동안 열릴 유진 박 콘서트를 위해 밴드 연습이 있었다. 백두산 밴드의 전 드러머를 포함한 밴드 크루를 꾸려 연습실을 대여해 며칠간 연습을 했다. 하지만, 밴드 마스터도 없고, 제대로 세션도 맞춰보지도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그냥저냥 밀고 나가는 게 다였다. 유진 박도 연습을 리드할 수 있는 멘탈 상황이 아니기에 그 어떤 의견도 나누지 않고 본인 연주만 해나갔다. 그러니 밴드의 합이 맞을 수 있었겠는가?

콘서트는 그야말로 대실패였다. 라이브 밴드보다 오히려 MR 반주에 맞춰 연주한 나의 게스트 순서가 더 빛이 날 정도였다. 유진 박은 공연 내내 무표정으로 정면만 보며 가만히 서서 연주했고, 밴드랑 엇나갈 때마다 마이크에 대고 ‘속상해’를 연달아 외쳐댔다. 결국 비싼 티켓을 사서 무대 제일 가까이에 앉은 VIP들이 모두 불만족스러워했고, 그 불똥은 유진 박과 밴드에 튀었다.

부산에서의 일정 내내 밴드 멤버들을 제대로 된 숙소가 아닌 찜질방에서 자게 했고, 제대로 된 식사도 제공해 주지 않았다. 매니지먼트 차원에서 질병을 앓고있는 유진 박에게 적절한 치료와 서포트를 제공해줬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저 공연을 잡고, 수익을 내는데만 바빴던 것이다.

유진 박의 조울증의 심각성을 깨달은 매니저의 관심이 나에게로 옮겨온 듯 했다. 그는 나로하여금 닥치는 대로 오디션을 보게 했고, 나는 항상 5분 대기조였다. 집에서 머리를 감고 있다가도 지금 당장 달려오라는 콜을 받으면 머리도 제대로 헹구지 못한 채 급히 달려가야만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오디션장은 술집과 재즈바였다.

나는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연주를 해 보라고 하면 바로 어떤 장르든 연주를 해야 했고, 노래하고 춤춰보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춰야 했다. 가끔은 술자리에도 동석해야 했으며, 내가 원하지 않는 트로트나 뽕짝 장르도 무조건 해야만 했다.

매니저는 어떠한 방향성도 제시해 주지 않고, 트레이닝도 시켜주지 않은 채 무대 위에 서게 하고, 오디션을 보게 하면서도 공연 계약서에 명시된 최저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이는 너무나 큰 스트레스이자 문화 충격이었고, 나는 이를 견디지 못해 집에만 오면 미친 사람처럼 벽에 머리를 박았다.

뉴질랜드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를 하며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가 싶다고 하기도 했다. 사실, 세상 음악을 하고자 했던 이유가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음악으로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는데, 그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장본인인 나는 병들어갔고, 술집 음악가로 전락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두 달여 간 유진 박을 등에 업고 무대에 서면서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죄악 된 일들을 무수히 경험했다. 그 와중에 매니저는 전속 계약서를 가져와 서명하라고 했다.

나는 그 계약서를 뉴질랜드 가족들에게 보내 변호사인 언니에게 검토해 달라고 했다.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본 언니는 계약서에 허점이 너무 많고, 나에게 불리한 항목이 많다고 지적하며, 일단 서명하면 3년 동안 그런 계약에 묶여 있게 된다고 했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과연 이렇게 활동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 내게 이 죄악 된 세상 음악 시장 가운데서 빛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믿음과 힘과 정신력이 있을까? 오히려 내가 죄로 더 물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스스로 자문해보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NO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서명하지 않은 계약서를 돌려보내는 것으로 유진 박과 그의 매니저와 결별했다.

“하나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유진 박 매니저와의 계약도 무산되었고, 세상 음악에 다시 도전할 자신도 없어요. 뉴질랜드로 돌아가야 하나요?” 하고 매일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기댈 곳이 하나님뿐이었으니…

그러던 중에 뉴질랜드에서 섬기던 교회의 전도사님으로 부임을 하셨다가 타국으로 선교를 나간 선교사님과 연락이 닿았다. 잠시 한국에 방문하신 것이었다.
“해나야, 다음 주일날 나를 파송해 주신 제암 교회에 와서 연주랑 간증 좀 해줘.”
“네? 제가 교회에서요? 제가 감히 어떻게 교인들 앞에서 간증과 연주를 해요?”
“괜찮아, 잘 할 수 있을 거야. 부담 갖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찬양과 하나님이 네 삶에 역사하신 내용을 마음껏 나누렴.”

나에겐 너무나도 큰 부담이었다. 왼팔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을 때 바이올린을 하나님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하겠노라고 다짐은 했지만, 관객 앞에서 ‘사역’을 하기엔 내가 너무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래서 더 기도하며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간증문을 준비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기적과 은혜를 글로 적어 스피치 연습을 했다. 또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은혜로운 찬양을 간증에 맞춰 선곡하고 반주 음악(MR)을 구해 연습했다. 워십 댄스도 안무를 직접 짜서 준비하여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드린다는 생각으로 연습했다. 간증 중간중간에 흐름에 맞게 노래와 바이올린 연주, 워십 댄스를 다채롭게 넣어 은혜가 배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기획했다.

드디어 내 첫 ‘사역’의 날이 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단상에 올라가 준비한 사역을 마음껏 펼쳤다.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고, 나를 포함한 제암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예배로 드려졌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자리에 당시 감리교단 ‘충청 청년관’ 관장으로 있던 박정민 목사님도 참석하셨다. 집회가 끝나고 박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목사님이 은혜를 많이 받으셔서 나의 사역을 다른 교회에도 소개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충청도에 있는 감리교회 목사님들께 나의 사역을 소개하셔서 자연스럽게 교회 사역이 이어져갔다. 또, 교회뿐만 아니라 모교인 목원대학교 채플에도 소개해 주셔서 신학생들 앞에 서게 되었고, 입소문이 나서 ‘남서울 대학교’ 수천 명의 일반대 학생들 앞에서도 연주와 간증을 나누게 되었다.

이렇게 노래하는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해나리의 사역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소원했던바 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내가 세상 매니지먼트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도록 내 길을 인도하셨다.

그 이후로도 박정민 목사님은 나의 스케줄 매니저 뿐만 아니라 로드 매니저 역할까지 감당해 주셨다. 사역지에서 사례비도 조금씩 책정해서 주기 시작했는데, 박 목사님은 본인의 수고비는 고사하고 유류비까지 마다하시며 내 사역을 도와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매형’ 되시는 정회덕 목사님도 전라도 지방의 교회들을 소개해 주셔서 사역의 지경이 전국구로 넓어졌다. 이처럼 주께서 예비하신 ‘목사님’을 ‘매니저’로 만나게 하셔서 내가 서원한 대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셨고, 꿈꾸던 대로 수많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해에 한, 두 번씩 뉴질랜드 집에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현지 교회와 학교 사역을 주선해 주시는 ‘키위 매니저’도 붙여주셨다. 현지 기독 신문사의 기자 출신인 마이클 해밀턴과 침례교단 목사님인 존 에드먼슨이 발 벗고 나서서 현지 사역을 연결해 주신 것이다.

이 두 분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와 달란트를 통해 뉴질랜드 현지인들을 깨우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주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여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신 주님의 용사 두 분은 지금 천국에서 빛나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