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어느 날 밤, 늘 다니던 술집에서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술을 마신 다음 집에 돌아왔는데, 플루토가 나를 슬슬 피해 옆방으로 가려고 했다.

‘이 녀석, 이리 와!’ 하고 소리치며 나는 고양이를 난폭하게 움켜잡았다. 그러자 놀란 고양이가 발톱으로 내 손을 할퀴며 가벼운 상처를 냈다. 순간, 나는 악마와 같은 분노에 사로잡혀 제 정신을 잃어버렸다. 나는 조끼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불쌍한 고양이의 목을 붙잡고, 아주 태연하게 한쪽 눈을 도려내었다.”

이번 작품은 미국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1843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다. 1인칭 소설로 ‘나’가 사형 집행 전 날에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검은 고양이’를 읽으면 한 인간의 삶을 철저히 파멸시키는, 알 수 없는 어둠의 존재가 실감나게 와 닿는다. 그 점을 작가는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부터 쓰고자 하는 이 터무니없고 끔찍한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이 믿어주기를 바라거나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믿어달라고 하는 것은 미치광이의 잠꼬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미친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먼저 작품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나’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유순하고 동물을 좋아했다. 크고 멋진 고양이를 한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이름이 플루토(Pluto)라고 하는 까만 고양이였다. 플루토는 날 무척 따랐다. 집 어디든지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근데 어느 날부터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말았다. 술이 화근이었다. 술을 마시면서 내 성격이 난폭해졌다. 어느 날 밤, 술이 취해 집에 돌아왔는데 플루토가 날 슬슬 피하는 것 같았다. 플루토를 잡으려하자 그 놈이 날 무는 것이었다. 화가 치밀어올라 그만 주머니칼로 플루토의 한쪽 눈을 도려내버렸다(글머리의 지문).

다음날 술이 깨고난 뒤, 난 내가 한 짓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그런데도 술을 끊지 못했다. 한쪽 눈을 잃은 플루토는 나만 보면 피해다녔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첨에 가졌던 죄책감이 사라지고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급기야 플루토의 목을 올가미로 묶어 정원에 있는 나무에 매달아 교살시켜버렸다.

그날 밤, 집에 불이 났다. 우리 부부와 하녀는 가까스로 화염을 피했다. 난 타다 남은 벽에 목에 밧줄을 두른 큰 고양이의 모습이 새겨져있는 걸 보았다.

몇 달이 지나 난 플루토와 매우 비슷한 고양이를 술집에서 보게 되었다. 집까지 나를 따라왔다. 애꾸눈이었다. 난 싫은데, 그럴수록 더 날 따랐다. 그 놈의 가슴에 있는 흰 반점이 교수대 모양으로 변하면서 플루토의 교살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내와 지하실을 들렀을 때 그 놈이 내 발밑으로 들어가 하마터면 계단에서 넘어질 뻔 했다. 그 직후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은 그 사건에 대한 ‘나’의 증언이다.

“나는 극도로 화가 났고,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도끼를 들어 고양이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아내의 제지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악마도 못당할 만큼 분노에 휩싸여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그 도끼를 아내의 머리에 내리박았다.“

난 지하실 외벽과 내벽 사이에 아내의 시체를 집어넣고 벽을 새로 발라 범행을 감췄다. 고양이를 찾았지만 그 놈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후 경찰이 아내의 실종사건에 대해 조사를 나왔다. 경찰이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난 승리감에 도취해 미친 놈처럼 아내의 시체를 숨긴 지하실 벽을 두드렸다. 그때 기괴한 소리가 벽을 타고 지하실에 메아리로 울렸다.

수상히 여긴 경찰이 벽을 허물자, 그 안에서 아내의 시체가 나왔고 그 머리 위엔 살아있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기괴한 소리의 정체는 다름아닌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내가 고양이를 산 채로 아내 시체와 함께 벽에 묻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섬뜩한 내용이다. 유순한 성품의‘나’가 어찌 이토록 끔찍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일차적 원인은 술에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부터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 것이다.

러나, 그렇다고 ‘검은 고양이’의 메시지가 금주캠페인에 있진않다. 소설에서 술이 악의 도구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술 자체보단 그걸 통해 한 인간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독자의 관심을 향하게 한다.

작가는 그 존재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 존재의 정체를 알아야 할 필요에 직면한다. 에드거 앨런 포의 실제 의도가 그렇든 그렇지않든,‘검은 고양이’는 필연적으로 우릴 성경으로 이끈다. 다름아닌 성경이 그 어둠의 존재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 답을 우린 에베소서 6:12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그렇다. ‘검은 고양이’에서 나의 파멸 배후엔 악한 영이 있다.

소설에서 우린 분노조절 장애란 병적 현상을 본다. 성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분노조절 장애자는 가인이다. 동생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만 열납하셨다(창세기 4장). 이에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엄명하셨다. 그럼에도 가인은 결국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였다. 살인으로 치달은 가인의 통제되지 않은 분노 배후에 악한 영이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31에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우린 갈수록 더 분노에 휩싸여가는 살벌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직장에서의 버럭 상사, 불뚝 성미의 고객, 자녀에게 폭언과 매질을 일삼는 부모, 운전대만 잡으면 헐크처럼 변하는 운전자. 욱, 하는 맘을 다스리지 못해 이름에 ‘욱’자를 새기고 살아야 할 그들이 바로 내 이웃이고 또 내 자신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에서 자유롭진 않다. 불붙은 내 분에 악한 영이 몰래 기름을 끼얹으면 아차, 하고 돌아설 틈도 없이 폭발해버린다. 뒤늦게 찾아 든 죄책감으로 뼈가 쇠하고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지만(시편 32:3,4) 때는 이미 늦었다.

이럴 때 우린 어찌해야 할까? 무엇보다 주께 먼저 아뢰야 한다. 시편 32편에서 다윗이 그랬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편 32:5).

더불어 한가지를 더 기억하자. 물에 뜬 찌꺼기는 물이 잠잠해질 때에야 밑으로 가라앉는다. 행여 또 다시 분에 휩싸일 땐, 즉시 모든 걸 멈추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자. 그럴 때 어지럽게 떠돌던 분의 찌꺼기가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시편 62편의 다윗이 또한 그랬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편 62:1).

잠잠한 다윗의 영혼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이 분노조절에 힘겨워하는 모든 분들께 임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