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or 직업병!

이제 크라이스트처치의 버스 운전대를 잡은 지도 만 5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5년간 운전대를 잡으며 정말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평생 책상에 앉아 있거나 사역 일선에만 있다가 운전대를 잡고 돌아다니자니 책상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다 겪었는데요, 때로는 익숙해짐 때문에 일어나는 황당한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새로운 일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생긴 버릇들, 이를테면 이런 게 직업병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저는 사역자로 살면서도 혹시 직업병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던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사람을 만나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내어야 했었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평범한 일들도 말씀에 빗대어 해석하려 하던 것, 영화나 문학작품 속에서도 기독교적 가르침을 찾아내던 것, 감동을 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혹시 기독교인은 아닌지 확인하던 것, 뭐 이런 것들이 생활 속에 드러나면 주변에서 농담으로 ‘사역자로서의 직업병이다’라고 하곤 했었지요.

또 이제 운전을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운전기사로 살면서 느끼는 직업병들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실 직업병이라기보다는 직업상 생긴 버릇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요.

맑은 날 폭풍 와이퍼
회사에서 운행하는 대부분의 버스는 유럽에서 생산된 차들로 방향지시 등 스위치와 와이퍼 스위치가 운전대의 왼쪽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시아 산 차량들은 방향지시등 스위치가 오른쪽에, 와이퍼 스위치가 왼쪽에 있습니다.

우리 회사 버스는 대부분 유럽 산, 교대용 차량은 일본산 차량이라 방향지시등을 켤 때 잠시 혼란에 빠지곤 합니다. 짐작 가시지요? 버스 운행을 마치고 교대용 차량을 운전하며 좌우회전을 할 때면 심심치 않게 방향지시등 대신 와이퍼를 켜곤 합니다. 아주 맑은 날인데 말이죠. 그것도 아주 격하게 움직이지요. 방향지시등 스위치인 줄 알고 와이퍼 스위치를 끝까지 젖혔을 테니 얼마나 격하게 움직였겠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아주 맑은 날 회사에서 나오는 다른 교대 차량의 와이퍼도 매우 심하게 움직이는 것을 목격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겁니다. 저 말고도 많은 기사들이 자주 헷갈리는 거죠.

승객이 기다리고 있다
하루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열심히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버스 정류장에 승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버스정류장에 정차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동문 스위치를 찾는데… 아뿔싸!!! 제가 운전하고 있던 것은 버스가 아니라 제 승용차였습니다. 승객은 어리둥절, 저는 화끈화끈! 하루 10시간 내외의 운행을 마치고 귀가할 때면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는 안도와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여유롭게 운전하다 보면 피곤한 탓인지 간혹 내가 운전하는 게 버스인지 승용차인지 헷갈릴 때가 있더라구요.

새벽, 잠에서 깨다
이런 경험은 직장인이라면 모두다 한 번쯤은 경험하셨을 텐데요, 왜 그런 날 있지 않나요? 분명 쉬는 날인데 출근 시간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기적(?) 말입니다. 심지어 저는 운행 시간이 일정치 않은 시프트인데도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새벽에 눈이 떠집니다. 정작 일하러 가는 날은 아침에 눈 뜨기가 정말x3 힘든데 말이죠.

Thank you
제가 버스 기사로 일하는 중에 가장 잘하는 일은 바로‘인사하기’입니다. 승객들이 승차할 때, 아침엔 Good morning, 오후엔 Hello, Hi, Good afternoon 등등…… 물론 승객들이 하차할 때도 꼭 인사를 합니다. Thank you, Bye, See you, Have a good day 등등.

이제 오랜 시간 일을 하다 보니 이런 인사가 입에 밸 정도가 되었어요. 인사할 상황이 되면 입이 알아서 척척 적당한 말을 내뱉어 줄 정도지요.

하루는 딸아이 하교 픽업을 하는데 내친김에 딸아이의 친구도 함께 픽업을 해 주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친구는 황송해하며 고마워했지요. 그래서 내릴 때 진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Thank you~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화답했지요. Thank you~! 아니, 제가 태워다 주었는데 제가 고맙다니요…?

그래서 딸 아이가 묻더군요.
“아빠가 픽업해줬는데 아빠가 왜 고맙다고 해요?”
“아빠가 고맙다고 그러든?”
“네.”
“우웅…, 너랑 친구 해 줬잖아. 특이한 너랑 친구 해 줬으니 얼마나 고맙니?”

아, 텔레매틱스여
우리 회사의 각 버스에는 기사들의 안전운전과 난폭운전 예방을 위해 Telematix라는 삐삐 크기의 자그마한 기계가 운전석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기계는 기사가 급가속, 급제동, 과속 등을 했을 때 경보음을 내어 알려주는데요, 기사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가차없이 경고를 날리거든요.

이게 Telematix 격려금이라는 명목으로 보너스 수당과 연관되어 있다 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거든요. 다른 건 그래도 괜찮은데 저에게는 급제동이 아킬레스건입니다.

다리가 짧은 탓(?)인지 유난히 급제동에 많은 경고음을 받는 편인데요, 그래서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신경을 많이 씁니다.

어느 날 제 승용차를 운전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바뀐 신호에 조금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리곤 찾았지요, Telematix가 노란색 경보음을 울렸는지, 빨간색 경보음을 울렸는지를…

꿈에서도 버스를 몰다
내가 영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가진단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외국인이나 어린이가 하는 영어가 들리기 시작하면 영어를 잘하는 거랍니다. 둘째는 술 취한 사람의 영어가 들리면 영어를 잘하는 것 이라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을 영어로 꾸면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는 증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운전 좀 한다는 사람은 꿈에서도 운전을 하나 봅니다. 저는 꿈에서도 운전을 합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저는 완전 엉터리 기사로 등장합니다.

버스를 몰고 노선 바깥으로 가질 않나, 버스를 몰고 한국까지 가질 않나, 버스를 몰고 시작점으로 가야 하는데 종점으로 몰고 가질 않나… 그래도 꿈자리의 압권은 종점에서 잠깐 쉬려고 버스 뒷자리에 몸을 뉘었는데 서너 시간을 내리 자버렸던 꿈이 압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악몽이었죠.

꿈에서도 버스를 모니 이제서야 전문가가 된 것 같기도 한데, 꿈속에서는 사고만 치고 있으니 전문가가 아직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꿈 속에서도 운전하는 저, 직업병 맞죠?

오늘은 농담 삼아 ‘직업병 아닌 직업병’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어느 유명한 프로듀서는 자신이 훈련하는 가수를 성공시키기 위해 밤중에 자다가도 그 가수 노래의 어떤 부분을 틀어주면 반사적으로 몸이 안무를 따라 할 정도가 되도록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지금의 저는 버스를 운전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직업병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르침, 행함이 저절로 배어 나오는 그런 크리스천 직업병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해 전문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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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진
침례신학대학교 졸업.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장로교회 교육부서 담당 및 문화사역. 2014년부터 레드버스에서 드라이버로 일하고. 영상편집자로 활동하면서 현재는 성가대지휘자로 섬기고 있다. 사역자와 이민자로서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적용하며, 겪었던 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