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평화로운 나라 뉴질랜드, 하지만 그 가운데도 아픔이 존재하고, 어둠이 존재한다. 최근 영국의 Nuffield Trust에서 보도한 자료에 의하면 19개국의 선진국 중 가운데 뉴질랜드는 만 10세에서 만 19세의 자살률이 제일 높다.

뉴질랜드의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들과 선진국 중에서 제일 높은 건 이번만이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마오리 학생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봤을 때‘인종차별’과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 이유에 속하는 것 같다.

한인 1.5/2세대들 중에서도 우울함과 많은 연관성이 있다. 이 주제가 한국도 그렇고 뉴질랜드 안에서도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이곳에 있는 한인 1.5/2세대들 또한 부모 세대와의 갈등, 그리고 정체성 혼란 등으로 인해 심각한 경우는 자살로 이어지는 현실이다.

주변 친구 중에도 자해를 하거나, 우울함에 빠져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친구들을 봤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외로워서, 삶의 이유가 없어서, 가족을 포함한 관계의 어려움 등등. 결국엔 대부분의 우울함과 자살 시도는‘관계성’의 어려움이나 결핍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에서일까.

교회 안에서 수없이 들었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 말씀으로 인해 종종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우울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년에 리 커넥트가 진행한 정신건강 워크숍에서 강의를 진행해준 정신건강 의학과 전문의에 의하면 우울함도 감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 몸이 지치고 아프듯이, 우리의 정신도 지치고 아플 수가 있다. 그 모든 걸 영적으로 해석할 때 생겨나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 시편에 보면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우울증 증상들이 나온다. 우리의 괴롭고 힘든 감정들은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있고 아뢰야 되는 부분이지, 숨기거나 억지로 무시할 감정이 아니다.

지금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아니 말했더라도 해결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며 혼자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상 상담 치료를 받는 것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또한 크리스천이라면 때론 더욱이 완벽해야 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갈 때가 있다.

감정 자체가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우린 악하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슬픔이라는 감정도 악한 게 아니다. 시편 기자들은 보통 전반부에 어려움을 고백하고, 후반부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끝난다.

상황이 변하고, 감정이 변해야만 한다는 고백이 아니라, 나의 힘든 상황과 감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 이 고백은 단순히‘나는 다 좋아졌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라는 고백이지 않을까.

우울함이라는 문제를 두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변에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 결국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더 피부로 와 닿는 문제이지 않을까.

고민하지만 쉽게 해결방안이 나오진 않는다. 힘내라는 말 또한 상대방에게 부담감이 될 수도 있기에.. 그렇다면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 옆에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작년에 리 커넥트는 이와 관련되어 행복 밀당 캠페인을 진행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서로를 돌아보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우울함을 다 뿌리 뽑을 순 없지만,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긍정적인 메시지가 담긴 스티커를 문에 붙임으로써 어느 우울한 날 그 메시지가 마음에 닿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얘기들이 많아지고 모아지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우울함을 감추는 게 아니라, 좀 더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생겨나면, 아니 적어도 교회나 내 주변 사람들과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혼자 아파하다 지치는 게 아니라 함께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주변에 누군가가 힘들어하고 있다면 “기도해”, 또는 “말씀 읽어”가 아니라, 함께 있어 주는 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만약 나 자신이 힘들다면 그 감정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그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감정이 하나님 앞에서도 표현되고, 마침내 시편 기자들과 같은 고백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우울한 나여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나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