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로빈슨은 고개를 치켜들고 동료들을 살펴보았으나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파도에 또 휩쓸리기 전에 빨리 기슭으로 올라가자.’
다시 기운을 내어 간신히 일어나 바다에서 육지로 헤엄쳐 나왔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로빈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 혼자만 살아남고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단 말인가?’

이때부터 로빈슨은 무려 28년을 홀로 무인도에서 살게 된다. 우린 지금 영국의 작가 다니엘 디포(Daniel Defoe)가 1719년에 발표한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를 읽고 있다. 원제는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이다.

로빈슨은 모험심이 강했다. 바다로 나가는 것 말고는 어느 것에도 성이 차지 않아 선원이 되었다. 로빈슨의 두 형을 이미 잃었던 아버지는 위험한 바닷길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로빈슨은 배를 탔다.

어느 날, 그가 탄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다. 해적 두목의 노예로 전락한 로빈슨은 탈출을 꾀한다. 바다에서 그를 구조한 선장의 도움으로 로빈슨은 브라질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농장을 운영해 꽤 큰돈을 벌게 되었다.

농장주들에겐 값싼 일꾼이 필요했다. 로빈슨은 흑인 노예를 구하기 위해 서부 아프리카로 향했다.

로빈슨은 신앙인이었지만 아직은 명목상의 크리스천일 뿐이다. 하나님 대신 돈과 모험심이 그의 삶을 이끌었다.

그가 탄 배는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 난파된다. 동료 선원들이 모두 죽고 로빈슨 홀로 낯선 무인도에 고립되고 말았다. 그런데 모든 걸 다 잃고 혼자만의 생존을 시작하자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돈이 우선이었던 그가 무인도에서 참된 신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우연히 마주친 스무 포기쯤의 보리(barley) 이삭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건 대체 무슨 풀일까?’

허리를 굽혀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보리였다. 푸른 잎사귀는 잔잔한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그 이삭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외딴 섬에서 보리가 저절로 났을까?’

로빈슨은 곧 자기가 버렸던 너덜너덜한 자루를 기억해냈다. 쥐들이 훔쳐먹고 깍지만 남겼기에 털어 버렸었는데, 그 중에 몇 개의 알갱이가 싹터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로빈슨은 그 보리 이삭을 보며 홀로 된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로빈슨의 마음속에서 참된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로빈슨은 난파선에서 발견한 성경을 틈틈이 펼쳐서 읽고 또 읽었다. 성경을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었다.

영적으로 가장 극적인 변화는 로빈슨의 무인도 생활 25년째에 일어났다. 난파 위기에 처한 스페인 범선을 본 때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선원들은 이 섬에서 피어 오르는 불길을 보기만 해도 용기를 얻을 것이다.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불을 피워야 한다.’

로빈슨은 소중한 화약을 아낌없이 써서 불꽃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그 배는 결국 침몰당하고 한 사람도 살지 못했다. 그러나 로빈슨이 변했다.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던 그가 배의 선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바쳤다.
“하나님, 지금 저 바다에서 폭풍과 싸우는 가엾은 선원들의 목숨을 건져 주옵소서!”

로빈슨 크루소의 이 모습은 성경의 욥을 떠올리게 한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지만(욥기 1:1), 그의 신앙은 자신과 가족에게만 머물러 있었다(욥기1:5). 그는 자기 의로 가득했다. 혹독한 고난 중에도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욥기 32:1) 친구들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던 욥이 42장에 이르러 드디어 하나님을 만난다. 자기 의를 앞세우던 그의 죄를 회개하기에 이른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

뒤이어 욥은 자신을 정죄한 친구들을 위해 중보기도까지 바치게 되는데, 그때에야 하나님께서 비로소 욥을 고난에서 건지시고 회복을 이루어주셨다. 욥기 42:10 말씀이 그 감격스러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로빈슨 크루소도 그랬다. 그에게 구원의 빛이 임하기 시작한 것은 난파선의 선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바쳤던 때부터였다. 그 이후 로빈슨은 그간 두려워 떨던 식인종과 맞서 싸웠고, 평생의 동반자 프라이데이(Friday)를 만났으며, 반란 선원에게 포로된 영국 선장을 도우면서 그 계기로 섬을 떠나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작가가 살았던 18세기 유럽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로빈슨은 프라이데이에게 자길 주인님(master)이라 부르게 했다. 둘이 동고동락하는 중에도 주인과 종의 본질적 관계는 바뀌지 않았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의 왕 노릇을 했다지만, 이 작품에서 그가 낡은 신분질서를 타파할 선각자적 인물로 설정되진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어린이 독자들이 좋아할 모험가나 무인도 생존 게임의 승자로 소개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왜 쓰였을까? 그 이유를 우린 작가의 서문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다니엘 디포는 그가 이 글을 쓴 목적이 “우리가 처하게 되는 온갖 경우에서 하나님 섭리의 지혜를 정당화하고 높이기 위함”(to justify and honour the wisdom of Providence in all the variety of our circumstances)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므로 ‘로빈슨 크루소’는 신앙 이야기다. 신앙의 눈으로 읽을 때 감동과 교훈을 얻는다. 돈과 모험심이 전부였던 한 사람이 어떻게 고난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지, 간증처럼 들려주는 이야기다.

현대인은 고독을 싫어한다. 어쩌면 갈수록 불신이 확대되어가는 세태가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돌이켜 보자. 첫 사람 아담이 이 땅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했던 것은 고독이었다(창세기 2:20). 그러고서야 하나님은 하와를 주셔서 독처를 면케 하셨다.

시인들의 남다른 관점도 유익하다. 박노해 시인은 “불편과 고독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고, 이해인 수녀는 “홀로 있는 시간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된다.”고 노래한다.

성경을 상고컨대, 예수님께선 친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일간을 홀로 지내며 금식하셨다(요한복음 4:1-2). 사도 바울도 회심 후 3년간 아라비아 광야의 고독 속에서 영성 훈련을 쌓았다 (갈라디아서 1:17)고 알려지기도 한다.

로빈슨의 무인도는 외롭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의 영적 골방일 수도 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나는 무인도에 있기를 거부하는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래도 거부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