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예배하게 하소서

지난 호에 소개한 김 선생과 A 교회의 이야기는 나 스스로 적지 않은 위로와 도전을 전해 주었다. 이유는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 또한 작은 공동체로 이루어진 교회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김 선생의 이야기를 글로 준비하고 나누면서 나는 도리어 나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나의 예배의 자리임을 다시 한번 주께 고백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교회 공동체의 크고 작음이 또는 성도의 수가 많고 적음이 결코 예배의 본질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때로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마음이 어려워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작은 공동체로 이루어진 교회는 분명히 그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물론 큰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도 나름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작은 공동체로 이루어진 교회들은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울 또 다른 누군가가 많지 않기에 마음의 짐까지 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지난번 김 선생의 고백과 같이 예배 반주자의 부재나 한 성도의 예배 출석 여부가 보이는 현실이 되는 것도 한 성도 한 성도가 맡는 직분과 직책의 무게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내가 가진 마음의 어려움 중 하나를 나누자면, 나는 이리 오랜 시간 교회를 섬기며 자라왔음에도 성도를 떠나 보내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여전히 느낀다. 워홀러나 유학생으로, 그리고 일반 성도로 함께 예배하던 지체들이 시간이 되어 또는 개인적인 사정이나 지역 이동 등으로 교회를 떠나게 될 때 나는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며 아파지는 마음을 쉬이 내려놓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의 인도하심 안에 있음을 믿고 확신하지만, 나의 여린 감정에서 오는 이 어려움은 시간이 이렇게 오래 흘렀어도 잘 배워지거나 강해지지 않는 영역이다.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그리운 존재이기에 더 그런 것이 아닐까 싶고 작은 공동체이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 글에 소개된 김 선생의 모습에서 어느 사역자보다 더 강하고 단단하게 교회를 지키며 섬기고 있는 한 성도의 모습을 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김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으로 헌신 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몸인 것을 주님은 그녀의 삶과 예배의 모습을 통해 나에게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해주셨고, 배우게 해주셨으며, 위로해주셨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던 작년 겨울의 한 순간을 떠오르게 해주셨다.

나는 작년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남섬 퀸스 타운에 있는 DST 숙소에서 이틀을 묵게 되었다. 그 숙소는 유난히 낡고 오래된 집이었고, 그곳에는 나무로 불을 피우는 벽난로가 하나 있었다.

둘째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기도하던 나는 너무 추워서 한 번도 켜보지 않은 벽난로로 눈이 갔고 서툴지만, 추위를 벗어나려고 열심히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보자를 알아본 벽난로는 쉽게 불을 피워주지 않았고 간신히 불을 붙여 조금 불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금세 불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불 피우는 것이 서툰 탓에 남은 성냥도 다 써버렸고, 나는 따뜻함을 포기한 채 다시 말씀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벽난로 안에서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잠시 멍해 있었다. ‘이게 뭐지?’좀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한참을 벽난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커다란 통나무(자르지 않고 넣은 통나무, 잘 몰라서 그냥 넣었다)가 불을 잠시 흡수했다가 다시 불을 일으킨다.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무가 타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불을 흡수한다. 그리고 다시 일으킨다.’ 내 눈에서는 불이 사라지지만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멍해 있는데 문득 내 마음에 기도가 울려난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일어나게 해주세요. 이 불이 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사그라졌다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안에서 이렇게 일어날 수 있게 해주세요. 깨끗하게 활활 타서 고운 재가 되는 나무처럼 우리 교회도 성령으로 활활 타올라 주님 오시는 그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는 교회 되게 해주세요.”

눈에서 한참 눈물이 흘렀고, 그 시간 주님은 내가 섬기고 있는 우리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끼게 해주셨다. 그리고 주님이 교회의 주인 되심을 다시 확인해 주셨다. 지금도 글을 적는데 그날의 감격이 내 마음을 움직여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교회는 나에게 그런 곳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몇몇 교회를 섬길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배우는 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예배의 자리이며 나는 이곳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 나의 예배의 자리. 언제나 바른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늘 말씀과 기도에 힘쓰시는 목사님과 늘 그 곁에서 의리를 지켜 주시는 너무도 귀하고 사랑스러우신 사모님, 그리고 믿음으로 각자의 자리를 너무도 잘 지켜주시는 본받을 만한 귀한 성도님들, 말씀 안에서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나의 사랑하는 young adult group. 우리는 작은 공동체이지만 이렇게 매주 최선을 다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예배하고 있다.

다만 우리 교회뿐이겠는가? 뉴질랜드에 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교회, 그중 특별히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수많은 김 선생들과 목회자들을 향해 주님은 오늘도 같은 사랑으로 위로하시며 함께 하고 계심을 나타내 주신다.

그리고, 이 은혜와 사랑의 한 언저리에서 나에게 주신 이 위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지기를 바라며 고백해본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 그곳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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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영
오클랜드 정원교회 전도사. 뉴질랜드에서 만난 너무도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작은 달란트를 사용하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삶으로 깊은 감동을 다른 이들에게 주었던 귀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눈물로 기도하고 먼저 배우며 교회를 세우는 신실한 교사의 삶이 진정한 사역자의 사명임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