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다시 예수 믿고 선원 선교해

지난 1983년 말, 교회를 떠난 지 30년 만에 예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 나의 영적인 기나긴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아내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내 속에서 30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성경을 읽었다. 1984년 한 해 동안, 수 없는 성경 봉독으로 세월을 안고 또 읽고 또 읽었다.

성경을 읽는 중에 창조주로 읽으니까 의심 가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순수하게 성경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믿음도 성장하게 되었다.

형님이 준 성경은 선물이 최고야! 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몇 사람을 구원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구원은 있었다. 형님이 주신 선물이 최고의 선물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1984년 2월부터 1주일에 두 번씩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웰링턴 부두에 있는 국제 선원회관(International Seafarers Centre of B.S.S)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선원선교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웰링턴의 선원회관을 찾는 선원들의 절반 이상이 한국 원양어선 선원들이었으며 주로 한국의 가족들에게 국제전화를 많이 했다.

한국의 삼원수산과 태창수산, 오양수산 등 몇몇 수산회사의 뉴질랜드 어업 전진기지가 웰링턴에 있었기 때문에 삼원 27호와 33호, 태창 83호와 85호, 오양 77호 등 10여 척의 한국 저인망어선이 뉴질랜드의 남쪽 어장에서 조업했으며 한번 출어를 하면 40여 일 후에 다시 기지로 돌아와 그동안 잡은 생선을 운반선으로 옮겨 실었다.

그리고 어망을 손질하고 연료와 선용품과 선원들의 식품을 공급받고 다시 출어하게 된다.

선원들의 고용계약이 2년이기 때문에 한국을 떠나오면 2년 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고참들은 체념을 하고 적응해 나가지만 신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기도 한다.

어선이 입항할 때마다 많은 선원을 만나게 되었으며 국제전화를 하거나 일용품을 구입함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박하고 있는 동안 선원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가장 먹고 싶어 하는 싱싱한 채소(정원에서 직접 가꾼 상추와 부추) 와 김치를 반찬으로 아내가 준비한 저녁을 주로 대접할 수 있었다. 네 사람 이상이 되면 나머지는 기차를 타고 와야 했다.

원양어선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위험한 생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보합제라는 조건으로 2년간의 고용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어획량을 많이 올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리한 작업에 메여있는 선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 대화를 나누었다.

웰링턴의 항구에 묶여 있는 한국 원양어선은 대리점 비용과 기름값, 그리고 선원들의 식비 등 밀려있는 부채가 말이 아니었다. 열 척의 오징어 채낚기 선박에 승선하고 있는 선원이 200명이나 되었다.

선원들은 조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웰링턴에 있는 대사관을 찾아가 한국에 보내 달라고 사정도 하고 항의도 했지만, 대사관인들 어쩔 수 있겠는가? 조업을 할 수 없게 된 원양어선 선원들로 연일 북적거렸다.

명령계통은 모두 사라졌다. 심지어 부식 창고에는 생선뿐이어서 아침, 점심, 저녁을 생선국으로 끓일 수밖에 없었다. 코에서 생선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했으며, 밥과 김치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나마 한국 원양어선 선원을 위한 예배는 드리고 있었다. 원목으로 있는 스미스 목사와 통역이 있는 한 예배는 드려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스미스 목사는 헌금을 발이 묶인 어선 선원들이 원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버스 2대를 빌려 구세군사관학교를 방문하고자 했다. 구세군사관학교는 숲속에 숨겨져 있었으며, 점심으로 비스킷과 초콜릿을 도매상에서 구매를 하였다.

사과는 통역이 구매를 했으며, 음료수는 스미스 목사가 준비하였다. 비스킷은 한 말 짜리 큰 통으로 포장된 것이었으며 내용은 대략 300개 정도는 되리라 생각을 했다.

마침 선원 가운데 교회에서 사찰 집사 경력이 있는 분이 있어 8명씩, 직급이 낮은 순서에 따라 나누어주기로 했다.

비록 하루 동안이지만 지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선원들에게 비교할 수 가 있겠는가?

10척이 참가하는 큰 행사였다. 하루 전에 전화가 왔다. ‘80명이 한꺼번에 이동하는데 시위라도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다.’

‘내가 책임진다.’라고 확신 있는 대답을 해 주었다. 시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확신이 있는 일은 처음이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행사이다.

구세군사관학교에 선원들이 도착하여 스미스 목사의 인도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 다음 사과 1개와 음료수 1개, 그리고 초콜릿 1개와 비스킷 3개씩 나누어주었다.

그러면 조금 부족할 것 같아 침묵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지 모른다. 운전자까지 모두 나누어주고 사찰 집사와 내 앞에서 부족한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약 선원들 앞에서 모자랐다면 어떤 대안을 세웠을까?

하루 동안 유쾌하게 놀고 선원들을 선박에 데려다 준 시간은 모두 다 끝내고 났을 때 오후 5시였다. 시간을 지킬 수가 있었다.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확신 있는 일이냐? 참 좋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구소련 선박에는 선박의 직계 상 찾아볼 수 없는 직분이 있었다. 부 선장이라는 직분이다. 외항선이 입항하면 당직사관과 조타수인 현문 당직자는 거의 갑판에서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구소련 선박은 달랐다. 현문 당직자가 부 선장에게 전화하면 곧바로 당도한다. 선원들에게 전도지를 주기 위해서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부 선장의 검열이 없으면 선원들은 절대로 전도지를 받아가지 않는다.

한꺼번에 다섯 가지의 전도지와 성경을 가지고 갔다. 러시아어로 인쇄된 성경전서는 나누어 주다 보면 대부분 한 선원이 세 권씩 가지고 간다.

한 권은 자기의 것이며 한 권은 부모의 것, 그리고 한 권은 친구의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어로 인쇄된 하나님의 말씀이 7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서 간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선박은 끝에 남은 성경을 서로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차로 금방 갔다가 오면 5분이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하면 이해를 한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위성국이 독립되어 러시아가 자유 경제체재가 되자 러시아 어린이 성경을 요구하게 되었다. 무작정 성서 공회에 한 상자에 36권씩 들어 있는 5상자를 청구했다. 한 권에 $32이었다. 하기야 전도지도 사서 쓰던 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