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되도록 김치를 준 고마운 한국 선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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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우리가 온 지도 6개월이 지났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대략 알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슈퍼마켓이나 채소 가게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마늘과 고춧가루가 없었다. 물론 배추나 무도 없었다. 김치와 가장 비슷하게 만든 것은 양배추를 썰어서 소금에 절인 것이었다.

저녁 한 끼, 밥 먹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아내의 솔직한 표현이 눈물겨웠다. 그러나 김치가 없다. 재료를 구하지 못해 만들 수가 없으니 더욱더 애타기만 했다.

우유를 마시면 설사를 하며, 다른 음식을 먹으면 속이 쓰리다는 아내의 호소에 의사를 만나야 했지만,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았다.

창고의 팀장은 우리보다 꼭 10년 먼저 영국의 뉴 카슬에서 2남 3녀의 자녀를 데리고 뉴질랜드에 이민을 온 사람이다.

뉴 카슬에서의 직업은 트럭 운전기사였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영국의 육군상사로 종군하였고 전쟁이 끝난 다음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제대를 했으며 이해심이 많은 영국 신사였다.

팀장의 일본에서의 삶이 많은 도움이 되어 나의 서툰 영어도 잘 이해를 하였다. 팀장 자신의 가정 의사(General Practioner, 이하 G.P)에게 잔업이 없는 목요일 퇴근 이후에 만날 수 있도록 전화 예약을 하여 우리와 함께 의사를 만나게 되었다.

의사가 환자인 아내에게 증상을 문의하면 팀장은 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내의 증상을 내가 이야기하면 의사는 직접 알아듣지를 못하고 팀장이 다시 설명을 해 주어야 이해를 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30-40분 이상을 기다리는 때도 있었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서도 짜증 한번 내는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많은 배려를 해 주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우리를 한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아내는 같은 증상으로 의사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났다.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병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위궤양을 발견했을 뿐, 다른 이상은 없다는 진단이었다. 의사의 처방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내가 가장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김치와 쌀밥이었다.

네피아와 헤이스팅스를 쌍둥이 도시라고 한다. 아름다운 항구도시인 네피아 항은 헤이스팅스에서 약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부두 뒷길로 들어서자 태극기가 올려져 있는 선박이 보였다.

선박을 승선할 때의 그리움이 남아 있어 그대로 지나가지 못하고 그 선박에 올라갔다. 본선의 기관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모처럼 한국 소식도 들을 수 있었으며 이민자의 답답함을 하소연할 수 있었다. 저녁을 함께 먹자고해서 너무나 고마웠다.

뉴질랜드에 온 지 6개월이 지났지만 한국 사람은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모처럼 한식으로 포식을 했다. 우리는 김치와 쌀밥만 정신없이 먹었다고 했다.

얼마나 그립고 정감이 가는 음식인가? 역시 우리는 한국사람 임을 다시 깨달았다. 모처럼 잘 통하는 한국말로 속 시원하게 몇 시간 동안 말을 하고 나니 쌓였든 긴장이 모두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내의 병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했다. 인정이 많은 한국 선원들은 그 말을 듣고 된장과 고추장, 김치 등 뉴질랜드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바리바리 챙겨 주었다.

그날 한국 선원들과의 만남은 멀리 떨어졌던 가족들을 만나는 것과 같은 만남이었으며 헤어질 때는 송별식이 된 것이다.

송별가를 불러주며 부탁하는 말은 하나같이 “건강히 지내십시오, 꼭 성공하십시오.” 이었다. 마지막 우리에게 노래를 선물하란다.

그토록 부르고 싶던 노래가 터져 나왔다.“동해 물과 백두산이…”애국가였다. 첫 절을 부르고 둘째 절부터 울음이 섞였으며 그 이후에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한인의 정체성이 이토록 뿌리 깊이 내려져 있었던가?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나라, 모국이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친구들이 있다. 한국의 민간외교관인 선원들이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지 않은가? 열심히 살자. 당당하게 살아보자.

된장과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은 아내에게 좋은 약이 되어 속 쓰림이 사라지게 되었다. 아끼고 아껴 몇 년 동안을 두고 귀한 약처럼 사용하였다. 너무나 고마운 한국 선원들이었다.

1965년도에 처음으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입항했을 때 오클랜드 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 대학생이 배를 방문했었다.

김치와 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선미에 계양되어 있는 태극기를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마침 방학 중이라 3일 동안 본선에 머물며 매 끼니 밥과 김치를 즐겨 먹던 그 학생이 얼마나 측은했었는지 모른다.

외국에서 동족을 만나면 가족같이 느껴지던 때였다. 모국이란 마냥 기대고 싶은 포근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 학생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오늘 하루도 모르는 나 자신이 아닌가? 낯선 이국땅에서 건강을 빌어주며 성공하라고 빌어주던 선원들을 위해서 먼 훗날 선원선교로 이어질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한국에서 출국절차가 마무리되어갈 때 아내에게 한국고전무용 몇 가지만 배우기를 부탁했다. 왜냐하면, 내가 외항선을 승선하던 1970년, 일본의 오사까에서 개최한 세계 산업박람회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마침 한국관에서 공연하는 한국 고전무용을 관람하고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받아 민간 차원의 한국문화 소개는 한국고전무용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무용에 소질이 있는 아내는 속성으로 아리랑 부채 춤과 창부타령, 노들강변 등 다른 고전무용, 두어 가지의 순서만 익히고 뉴질랜드로 오게 되었다. 직장에서 고된 일로 지쳤지만, 저녁에 틈틈이 거울 앞에서 연습하며 다듬었다.

1974년 모리슨 산업회사 무도회(Ball)에서 아내가 아리랑 부채춤을 소개했다. 한국을 떠날 때 한복 무용복을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입게 되었으며 한국 문화를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소개할 수 있어 너무나 감개가 넘치는 날이었다.

이어서 1975년 헤이스팅스 문화센터의 개관식에 초대를 받았고, 1976년에는 파마스톤 노스의 메시 대학에서 “한국의 밤” 행사와, 웰링턴에서 개최한 세계무역박람회의 “한국의 날” 행사에 한국고전무용 세 가지씩을 소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해서 웰링턴 국제 선원회관의 “선원 위로의 밤” 행사와 타우랑가의 Espan 양로원과 로토루아에 있는 양로원에서도 한국 고전무용을 소개할 수 있었다.